이번 주일인 1월 17일, 우리는 성탄절과 부활절 사이의 큰 교회 절기들 사이에 있는 주현절 후 둘째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왜 우리 인간들에게 중요한 분이신지를 밝히고 알아가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사명을 통하여 구유에 대한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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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또한 나 자신을 알아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이지, 결코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밝히시고 아울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밝히십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일에 우리가 읽게 되는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이름을 부르시다(사무엘상 3:1-10, 11-20)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새롭고 중요한 일을 행하려 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 말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우리는 당시의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 제사장은 눈이 침침했기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2절).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으며, 하나님과는 관계 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장면이 사무엘이 잠든 방으로 옮겨졌을 때,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3절)라는 언급 역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분명 어둡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시대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등불은 밝혀져 있었고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전에 누워 있으며,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새롭고 놀라운 일을 시작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말씀하시려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사무엘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일을 행하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이름을 부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누구인지 아셨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으며, 이제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2. 결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시편 139:1-6, 13-18)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친밀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피해서 숨을 곳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놓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닮을 때까지 우리를 결코 놓치 않으시며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찾으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친밀하게 잘 알려졌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사람들에게서 나 자신을 숨기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얼굴을 가꾸고 인격을 가꾸는데 시간을 보내며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얼굴의 표정으로 우리가 평가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잘 아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와 너무나도 친밀하기 때문에, 자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9: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결코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추적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부모님이신 주의 부르심에 사무엘과 같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3. 우리의 몸이 중요하다(고린도전서 6:12-20)
우리는 종종 정신적인 삶이 몸의 삶과는 상관이 없거나 정반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마치 우리는 육체적인 삶을 산 적이 없이, 태어날 때부터 영적이었던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위해서도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구원은 이 세상을 위한 구원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우리의 육신을 위한 구원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우리 육체를 치유하시고 고치시며 해방시키시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우리 몸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몸과 영혼, 하나님과 세상, 하늘과 땅의 관계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각각의 두 가지는 완전히 결별하여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인 삶은 일상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는 무관심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무슨 일을 하든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굶어 주는 동안에 예배 후에는 차고 넘치는 점심식사를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길거리의 창녀를 찾아가도 상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영혼이 예배를 드린다면, 육신은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몸은 쓸데가 없으며 버려질 껍데기라고 생각하는 그리스의 철학이나 동양 철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고 만지고 싸우고 배척하고 해방시키며 예배를 드립니다. 죄와 구원은 모두 우리의 육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다는 말은, 곧 우리의 육체적인 형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즉 육체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육체는 중요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육체를 통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위해 육체로 오셨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기 위하여 육체로 오셨습니다. 육체는 분명히 중요한 것이며 육체 역시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우리의 육체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육신 속에 성령으로 충만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꿔 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육신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4.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요한복음 1:43-51)
요한복음의 첫장은 서곡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영적인 크리스마스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안드레와 시몬을 부르셨고, 오늘 본문에서 빌립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나섰습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을 이미 아셨고, 나다나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그분을 알아가라고 하십니다. 나다나엘의 질문인 48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에 대한 나다나엘의 질문은, 예수님과 자신이 결코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시편 139편의 시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을 친밀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나다나엘은, 이제 예수님께 다가오기 위하여 일어납니다. 마치 시편 139편의 저자가 고백한 바와 같이, 나다나엘의 모든 행동을 보시며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시편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하나님만이 우리에 대한 친밀한 지식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미 주님은 나다나엘을 친밀하게 알고 계셨고, 이제는 나다나엘이 주님을 알아갈 차례입니다.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나다나엘이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지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잠시 잠깐 주님을 만났을 분인데,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자신이 들어왔던 모든 것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이자 목수 출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완전히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현절의 기간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갈구하고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보고 듣고 읽었던 모든 것을 종합하여, 예수님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이 깨달음을 위하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르시는 그 음성에 응답하고, 우리는 주님을 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거하는 이 땅에서, 우리의 육신을 통하여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바꿔 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주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희생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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