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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설교/18 욥기 설교

우리가 용서한 것과 같이 욥기 42장 7절-10절, 수요기도회 설교

by OTFreak 2021.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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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빚을 탕감해 주는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주인에게 그 돈을 모두 탕감 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는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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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만 달란트 비유와 탕감

마태복음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을 때, 악한 종이라고 주인은 부릅니다. 주인이 종을 부를 때 쓴 단어인 "악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네로스'(πονηρός)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쓸모 없는' '무익한'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주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히려 해로운 종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 쓸모 없고 해로운 종을 주인이 감옥에 가두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 단어는 바로 "탕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7절에서는 주인이 쓸모 없고 해로운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탕감'이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 '아피에미'(ἀφίημι)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제거하여 주다' '탕감하다' '용서하다'입니다. 주인이 종의 모든 빚을 제거해 주고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또 다른 말로 "용서해 주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 중에 마태복음 6장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 중에 "사하여"라는 말은 흔히 '용서하여'와 같은 말이며, 이 말의 헬라어가 "탕감"과 같은 '아피에미'(ἀφίημι)이기 때문에,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똑같은 뜻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는 나에게 빚진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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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욥의 용서

   오늘 본문은 욥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모든 그간의 갈등과 아픔들이 정리되는 상황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정리 방법은 "탕감" 즉 "용서"입니다. 욥기 42장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욥 42:7,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원망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생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신세 한탄을 했었고 아무런 소망이 없다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욥은, 자신이 했던 말들이 어리석은 말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자신의 모든 말들에 대해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회개를 받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용서하심 직후에 욥과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7절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특히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번제물을 들고 욥을 찾아가면 욥이 친구들을 위해 번제물을 드리고 기도해 줄 때,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 속에 있습니다. 세 친구들이 그간에 인과응보를 언급하며 욥의 숨겨진 죄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과 비난을 했었습니다. 욥을 억울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말들은 욥을 감정의 밑바닥으로까지 끌어 내렸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큰 감정의 빚을 졌습니다. 욥에게 큰 아픔을 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제는 욥이 이들의 감정의 빚과 실수들을 탕감, 혹은 용서해 줄 때입니다. 피해를 받은 피해자인 욥이 친구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 줄 때, 진정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3.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 영화 '밀양'

   '밀양'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배우 전도연 씨와 송강호 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편을 이미 잃었기에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밀양에서 아들은 결국 유괴를 당하고 유괴범이 요구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여 아들마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범인은 동네의 웅변학원 원장이었음이 밝혀지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픔 가운데 괴로워하던 여주인공은 동네 약국의 약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거기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감옥에 면회를 갑니다. 감옥에서 범인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 범인은 아주 태연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범인은 과연 용서를 받은 것일까요? 오늘 본문과 성경에 의하면, 범인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용서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자기 마음대로 남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피해자인 여주인공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만 하지만, 자기 편한 대로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했던 범인은 결코 용서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함께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 때 진정한 용서를 받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가슴 속에 가득한 빚을 탕감해 주어야 진정한 용서를 베푼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욥은, 세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이 욥에게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기에, 진정한 용서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4.  용서, 어마어마한 손해를 감수하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외치고, 용서 받았다라고 혼자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에 나온 범인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희생입니까? 내가 받아야만 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희생입니다. 
   일만 달란트,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역 전체의 1년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국가 전체의 세금의 12년치에 해당하는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이 정도의 빚을 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인에게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액수가 일만 달란트입니다.
   주인은 이처럼 엄청난 액수의 돈을 포기해야만 빚진 종을 탕감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큰 손해가 있어야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금전적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으며,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손해를 감수하고 탕감하고 용서할 때, 진정한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반드시 용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용서 받기 위해서는, 백 데나리온의 빚을 손해 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백 데나리온을 포기하지 못하면, 일만 달란트도 탕감받고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구절인 '우리가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구절은 결코 쉬운 구절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평생을 통하여 용서해야만 하고 용서 받아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5.  용서, 품에 안아 일으키는 것

   창세기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지 않고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의 의인이 있으면 용서하시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창세기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 의인 오십명을 봐서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히브리어로 '용서하다'는 뜻의 단어는 '나사'(נָשָׂא)입니다. 원래 이 말의 뜻은 '들어 올리다'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 내 앞에 꿇어 엎드리고 고개를 숙인 사람을 '안아 일으킨다'는뜻으로까지 확장되어 '용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쳐다보기도 싫을 텐데, 내 앞에 회개하고 사죄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일으켜 세우고 그 머리를 들어 쳐다보도하는 것이 용서라고 한다면, 용서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용서는 결코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나의 감정과 생각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 과연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쓸모 없고 해로운 종과 같을 뿐,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을 때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주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용서 받았음을 마음 깊숙히 깨닫고 느끼고 알 때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주님의 고통과 절규의 외침이 내 안에 가득차고 큰 울림이 될 때에, 내가 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모든 빚을 탕감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을 끌어 안고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일흔 번을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으며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오직 주의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6.  십자가 위의 주님의 용서를 본받아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우리 주님을 채찍질하고 온 몸을 때리고 침 뱉으며 모욕했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극심한 고통과 목마름 속에 밀어 넣은 원수같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께 결코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사하여(아피에미, ἀφίημι) 주셨습니다. 탕감하여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욥과 같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 채울 때, 우리 역시 주님 닮아 다른 이들의 빚을 조금씩 조금씩 탕감해 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탕감 받은 빚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탕감 받은 것과 내가 탕감해 줘야 할 빚을 비교해 봅시다. 그 탕감받고 용서 받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탕감해 주고 용서함으로써, 진정한 용서를 받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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