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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어를 사용한 방식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영성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언어를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롬 10:8; 참조. 신 30:14). 물론 여기서의 말씀 (the Word)은 예수님이시다. 인간됨을 규정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인 언어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 방법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유 (metaphor)의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서에서 은유가 없는 단락은 거의 없다. 이는 바울보다 앞서 활동했던 히브리 선지자들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은유는 언어를 정확히 사용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반대다. 은유는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것을 느슨하게 풀어 준다. 은유에는 규정이나 분류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은유는 먼저 마음을 움직이고 이어서 행동으로 옮기게끔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은유로 바위 를 사용할 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에서처럼(시 18:2) 반석 (바위) 하나만으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는 없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불합리하기 그지없다. 은유의 역할은 문자적인 묘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말해주는 관계(relationship)와 반향(resonance)을 찾기 위해 상상력을 사용하여, 또 다른 차원에서 의미를 찾는 행동으로 우리 마음을 몰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은유 앞에서 수동적일 수 없다. 능동적으로 상상해야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은유는 믿고 순종하는 삶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늘어지고 모호한 결말보다는 깔끔하고 간결한 것들을 좋아한다. 우리는 조직적이고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진지한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언어는 발견할 수 없다. 바울은 정의하기(define) 위해서가 아니라 일깨워 주기(evoke)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다. 그는 현미경 아래 놓여 있는 표본처럼 비인격화된 하나님의 진리를 나열해 놓지 않았다. 그는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 문장을 분석하지 않았다. 워즈워스(Wordsworth)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상세히 분석하기 위해 죽이는(murder to dissect) 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의 언어는 에너지가 살아 있는 들판과 같다. 그는 하나님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 전문적인 특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일반적 화법과 몇 가지 뜻을 동시에 내포하는 은유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들이 주는 모호함을 오히려 편안히 여기며 그것들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바울의 은유는 살아 있는 언어로서 내면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표현하며 형성해 낸다. 영성 개발은 이렇게 생동적이며 참여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차별 없는 공동체
마지막으로 바울은 공동체(community)에 관해 언급한다. 영성 개발은 따로 떼어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비인격적이거나 기능적 방법들로도 결코 발전시킬 수 없다. 영성 개발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만이 아니다. 사람들 곧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연루될 수 밖에 없다. 로마서의 첫 장에서 바울이 회중을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 모든 자로(롬 1:7) 부르는 것은 이 사실을 알려 준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롬 1:11) 말 속에는 그들을 향한 개인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그들 가운데에도 열매를 맺게 하려고(롬 1:13) 얼마나 자주 그들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지 언급한다. 이것은 일반화된 영성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에게 개인적으로 쓴 것이다. 당시에 바울은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편지 끝 부분에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16장),
로마서 1:16 본문을 보면, 개인적인 맥락은 놓쳐 버린 듯하다. 여기서는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대한 긴박한 문제를 다룸에 따라 풍부한 개인 관계의 맥락은 그늘 속으로 물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붕괴되는 공동체, 곧 성도들의 친교나 친교의 부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꼈고, 반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실제적인 영성 개발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공동체 전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8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다룬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역사적 계시의 주체 (insiders)였던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적 특성이 이방인들에 대한 특권의 징표처럼 여겼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복음이란 인종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아무런 차별도 없다고(3:22) 강력하게 주장한다.
9-1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권면한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롬 11:13) 우선 이스라엘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한편 1-8장에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동일한 죄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배척하지 못하도록 한다. 반면에 9-11장에서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구원의 나무(salvation tree)에 접붙이는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만 그 안에(in)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기적 때문에 안으로 들어왔으며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두 집단 모두 자랑스러워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르게 접근하지만 그 효과는 동일하다. 1-8장에서 유대인들을 겨냥한 죄 논증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는(롬 3:23) 곧바로 이어지는 9-11장의 기적 논증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과(롬 11:15) 짝을 이룬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하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감람나무(Gods olive tree)인 교회 에 접붙여진다.
12장에서는 로마 교회 구성원들에게 진정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왜곡된 계급 가정(class assumptions)을 마음에서 깨끗이 씻어 버리도록 한다. 그 후에 바울은 그들을 공동체로 호칭한다. 곧 차별이 없는 동등한 지평 위에 서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동일한 가족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로 호칭한다. 이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뒷전으로 하거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밀어낼 동기나 구실은 없다. 어떤 종류이든지 계급 구분, 곧 유대인과 이방인, 자본가와 노동자, 본토인과 이민자 부자와 가난한자, 젊은이와 늙은이, 유식자와 무식자 등의 구분은 공동체에 치명적이다.
한편 바울은 끝부분에(12-16장)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 그들에게 교훈을 준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롬 12:1),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함께 이루어진 진정한 성도들의 단체(communion of saints)인 그들 가운데서 35명이나 되는 많은 개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로마서를 끝맺는다.
나가면서
우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영성 개발이라는 최고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로마서에는 거대한 추상적 진리들이나 개인적인 일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신 성령의 능력으로 영성이 개발되어 가는데 있어 계속적으로 도움을 주는 하나의 활동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성경 말씀에 대한 복종, 신비의 수용, 은유적 언어, 공동체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 유진 H. 피터슨(Eugene H. Peterson)
로마서 연대기
- AD 30년 : 그리스도의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스데반의 순교
- AD 32년 : 사울의 다메섹 회심
- AD 44년 :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 AD 47-48년 :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 AD 50-52년 :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 AD 53-58년 :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 AD 58년 : 바울의 체포
- AD 61년 : 바울의 로마 투옥
- AD 64년 : 네로의 박해
- AD 67년 : 바울의 순교
- AD 70년 : 예루살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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