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사랑으로 맺어진 포괄적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대 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어떻게 그 첫 번째 도약을 이루었는지도 살펴보았다. 이제는 서신서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근거한 초대교회들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그리고 이 신앙 공동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지속적으로 교제하는지 살펴보자.
목차
성경 본문
-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
교회는 하나님 인식 단계로 나아가는 공동체다.
신약성경의 서신서에는 모인 공동체들(gathered communities)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 리스도의 성육신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과 성, 국적과 인종 그리고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자칭하는 신앙의 공동체들은 그 안에서 서로를 한 몸의 지체()라고 여기며 새로운 유기체로 변화되었다. 이들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서로 도우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간다. 이 땅에는 오래전부터 인본주의적으로 고안된 종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종교도 나름대로의 계명과 예식을 갖추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의 창조주와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교제를 하도록 돕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신 이 공동체들 안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는 영적인 삶과 활력의 중심이 된다.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골 3장). 또한 그 공동체들은 새로운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적인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은사에 대해서는 축하해 주도록 가르치고 있다(엡 4장).
초기의 모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역할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의미가 스며들도록 돕는 것이다(요일 1 - 5장).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 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 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교회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자생하는(self-replicating) 예수님의 공동체다. 모든 세속적 기관들과는 대조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능력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모이는 곳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그분 자신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거하신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삶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것과 같이 응답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 인식(God-awareness) 단계로 나아가는 공동체다(갈 5:22-26; 빌 2:11).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과 참 생명을 재발견하라
'교회'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모임 또는 집회 (assembly)라는 의미로,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추종자들로서 교회에 모였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모이고 있다.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특별히 서신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공동체, 하나님의 가족 등이다. 교회는 그 진리의 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장()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세우시고 유지해 주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기능들을 수행해 나갔다. 서로 친밀히 교제하고, 교정 훈련(corrective discipline)을 하며, 현명한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유하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절한 행동과 아울러 조화로운 연합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기능들은 초대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고 반영했으며, 더불어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역동적인 관계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이러한 기능들에 의문과 문제를 제시한다. 로마서부터 유다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신은 특정 공동체의 필요와 개인적인 특별한 관심사를 다루고 있다. 마치 상담 편지처럼 특별한 경우를 염두에 두고 쓴 편지들이다. 따라서 이 서신서들은 그 상황에 맞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인도와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공동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그들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 28)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나타내시며, 또한 그분 안에서 공동체의 연합과 새로운 삶을 이루게 하신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들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와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교훈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훈련의 요소도 제공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라 한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라고(딤전 1:3) 편지를 시작한 후에 계속해서 당시에 만연하던 다른 교리들을 설명한다. 서신서들은 초대교회에 지혜 문헌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안목, 곧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서신서에는 복음서의 신학적 함의()는 물론 구약을 상기시켜 주는 지혜의 격언들도 담겨 있다. 이것은 이해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함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6, 13).
각 서신서들은 각각의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어떠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로마서는 가장 중요하며 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로마서를 읽은 후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다시 발견했다. 로마서는 원래 일정 기간 동안에 모인 특정한 공동체를 위하여 쓰인 글이지만, 이후로도 많은 시대를 거쳐 사람들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이토록 감화력 넘치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진 인생의 비밀을 밝혀 준다. 그것은 헬라어로 조에(zoe), 곧 하나님으로부터만 기원하는 영원하고 자존() 하는 생명이다.
성경은 인생을 두 종류로 규정한다. 헬라어로 비오스 (bios), 곧 육체적이며 창조된 인생과 조에 (zoe), 곧 영적이며 영원한 인생 이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테류테 (teleute), 곧 육체적 죽음과 사나토스 (thanatos), 곧 영적인 죽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도전은 한 개인이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bios)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thanatos)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소외와 절망이 가득한 것은 이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생명(bios)을 영원한 생명(zoe)으로 잘못 이해하면 영성 개발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은 문제의 핵심도 볼 줄 모르면서 자구책()에 지나지 않는 영성 훈련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우리 인생을 통해 표현하고 세우고자 한다면,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저수지(zoe)를 재발견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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