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삶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형성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책이 그렇듯이, 로마서도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을 지도하기 위한 문서다. 바울은 식사를 준비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며, 일터에 가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며 기도하고 용서하도록 부름을 받은 남녀들의 모임을 배경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
목차
로마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성경 전문가들이 많이 인용하고 연구하는 책이다. 신학자들은 로마서의 깊이를 탐색하거나 로마서의 신학적 내용에 관한 학문적인 책을 쓰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만큼 로마서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에게 연구해 보고 싶은 도전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신학자들의 헌신적이며 훈련된 작업이 없었다면 로마서에 대한 이해는 아주 일천해 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가 로마서를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학자들은 우리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며 읽도록 도와줄 뿐이지, 우리를 위해서 로마서를 대신 읽어 줄 수는 없다.
이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로마서를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가 영혼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영성 개발의 작품임을 상기해야 한다. 로마서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는 공동체에 쓴 개인적인 편지였다. 그들 중에는 노예들이 많았으며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바울의 지성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우리와 같은 남녀 신자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서에 감동받을 준비를 하되, 위협받지는 않기를 바란다.
영성 개발의 네 가지 측면이 본문 안에 통합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의 삶을 형성해 주었던 것이며, 또한 우리 삶을 형성해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네 가지 측면은 바로 성경에 대한 순종, 신 비의 수용, 은유적 언어, 공동체에 대한 강조이다.
성경에 정통한 바울의 로마서
로마서를 읽어 가는 동안 우리는 바울이 독립적인 사상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추론을 거듭하며 궁극적 진리를 찾아가는 사색적인 사상가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모든 사고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울 시대에 성경은 우리가 지금 구약이라고 부르는 유대인의 성경이었다. 로마의 회중에게 글을 쓸 때 바울의 마음은 완전히 성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색내는 듯한 오만한 태도는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탁월한 책을 쓰는 사람이 농사 짓는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규모가 큰 회사의 재정을 관리하는 여성이 공중화장실에서 청소하는 여성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역사상 가장 유능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자랑거리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만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정신적 활동은 성경에서 계시로 받은 것에 굴복하고 순종한다. 성경적 계시의 말씀은 그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도구였다.
바울은 시험을 위해 중요한 것들을 놓친 채 공부만 했던 학생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는 인생의 전반부를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성경을 잘못 깨달아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부 역시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열정을 갖고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가? 이전에 바울은 활동적인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을 분노에 찬 성전(, Crusade)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성령께서 그의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바울에게 어휘를 제공해 주고, 상상력을 구체화하며, 그의 삶을 형성했다. 실로 성경은 바울에게 광대한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었던 구약성경 39권 가운데서 16권으로부터 65개의 인용구 절을 이끌어 내어 로마서 전체를 수놓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구약성경, 곧 이사야와 시편을 각각 18회, 13회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대부분의 책들을 두루 포괄했다. 한편 바울은 성경을 인용했을 뿐 아니라 성경 이야기에도 정통했다. 그는 선지자 조상들(prophet ancestors)이 기록한 모든 것에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풍성하게 확장된 이야기 속에서 전적인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스코틀랜드 목회자인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의 말을 빌리자면, 성경은 바울에 게 전적으로 자서전적인 것이다.
바울이 끌어안은 빛의 신비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서에 배어 있는 영성 개발의 또 다른 측면은 신비를 수용하는 그의 태도다. 바울은 신비를 수용하며 신비와 더불어 편안해 하고, 심지어 신비 안에서 기이하다. 자신의 감격을 표출하는 유명한 본문 로마서 11:33-36은 매우 인상적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사 40:13-14)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욥 35:7; 41:1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파악할 수도 없고 도식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세가 바울의 가장 강력한 논증의 문맥 속에(롬 9-11장) 등장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에게 있어 신비란 이론적으로 밝혀 내려고 최선을 다한 후에 남겨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그 본질(nature) 안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서 빚어가심에 따라 필연적으로 우리가 파악하는 것 이상을 그리고 우리가 설명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나님 안에서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그 이상의 것은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신비는 죄로 가득 찬 나의 자아의 세계에서 더 큰 세계로 오라고 부르는 공개 초청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비에 대해 참을성이 없다.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면 답답해 하고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바심은 영성 개발을 방해한다. 물론 무지의 영역을 꿰뚫고 실제를 파악해 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은 크다. 그리하여 신비 의 얽혀진 덤불이 지식 불도저들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는 것을 보는데 익숙한 현대인은, 바울이 씨름했던 종류의 신비 곧 우리의 지식이 증가할수록 오히려 깊이가 더 깊어지는 신비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끌어안은 신비는 반드시 추방되어야 하는 흑암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빛의 신비다.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뿐 아니라. 재생산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축소될 수도 없다. 이 신비를 끌어안으려면 겸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리 앞에서는 그 어떤 것을 통제하거나 결과를 예측하거나 사람들을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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