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수고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자식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때로 바울을 의심하고 비난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섭섭함을 나타내기도 했었습니다. 신앙 공동체요 위대한 사역자 바울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해 들었던 '고린도 교회'였지만, 고린도 교회 역시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1. 들어가며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에서나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한계점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든 교회들이 가지는 한계점들로써, 교회의 지도자를 어렵게 만들거나 성도들 간에 상처를 줌으로써 불신자들에게게 악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이 눈물로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죄악의 모습들이 적나라 하게 노출되었습니다. 음란함이나 부도덕, 그리고 분열의 모습으로 인하여 내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외부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2.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통하여 언급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 보고, 그 해결점도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1) 고린도 교회의 위치적인 한계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시'(city)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라는 도시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고린도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멤버들도 고린도의 관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므로 그 관습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고린도 시는,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 사이의 좁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매우 부유한 상업의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였습니다. 멀리 둘러 가야 하는 항해를 하기 보다는, 고린도 지역을 통과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기에 많은 배들이 이곳을 지나거나 머무르며 상업적인 활동을 하였던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치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고린도 시에는 여러 민족들이 다양한 풍습들과 언어들 그리고 종교들을 가지고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들은 인정해 줌으로써 화합하며 살아갔고, 이러한 모습들은 상업적인 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위해서는 서로의 다른 부분도 함께 공유하기도 했던 도시였습니다.
(2) 고린도 시의 모습
고린도 시는 그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부유한 도시였으며, 이 부유함으로 인해 타락한 도시로 불리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활발한 상업 활동과 함께 서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도시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습니다. 남겨진 유적지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만여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극장 시설이 있었고, 이 극장 시설에서는 여러 인종들이 모여서 운동 경기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운동 경기는 올림픽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신전인 '아프로디테' 신전도 이곳에 있었으며 신전에 속한 천여명의 매춘부도 있었기에, 성적으로도 타락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그리스어가 '고린도처럼 행동하다'(Korinthiazomai, Κορινθιαζομαι)인데, 그 뜻은 '매춘행위를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라는 말은 원래 '뿔'이라는 의미인데, '매춘행위를 하다'라는 의미로 바뀔 정도였으니 사치향락으로 인하여 얼마나 타락한 도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곳곳에 술집이 즐비했으며, 상업적으로 부유했던 이 도시는, 여러 면에서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가 될 수 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3) 고린도 교회가 고난 가운데 세워지다
이처럼 타락한 도시의 한 가운데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들이 고린도의 문화에 익숙했고 그 속에서 일을 하고 장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후 50년 경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를 들렀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도시인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회당을 돌아 다니며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바울 일행은 많은 고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발하기도 하였으며,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며 심히 떨기도' 하였다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2:3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고난과 눈물 속에서 타락한 도시 고린도 한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4) 고린도전서를 통해 드러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 드러난 실제적인 문제점들은 무엇일까요?
- 고린도 교회의 내부적인 분열이 있었다(1:10-2:16) :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었다.
-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도를 오해하였다(1:18-2:5) : 당시에 인정 받던 헬라 철학과는 달리, 십자가는 겸손과 섬김의 상징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 성령님의 계시에 대해 무관심 했고 무지하였다(2:6-16) : 육적으로만 판단하며 하나님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즉, 성령께서 하시는 신령한 일들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 가족간의 근친상간의 문제가 심각하였다(5:1-13) : 고린도 지역의 타락한 모습처럼, 근친상간으로 인하여 교회가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에 대해 징게하지 않았다.
- 세상의 법정에의 성도들끼리 송사하였다(6:1-8) : 믿음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였는데, 믿음이 없는 세상 법정이 신앙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 도덕적 태만이 심각하였다(6:9-20) : 우상숭배, 간음, 남색, 탐색, 도적, 술취함, 토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 잘못된 결혼문제와 심각한 이혼 문제가 있었다(7:1-40) : 성적인 타락과 함께 쉽게 이혼하였다. 불신 남편의 경우에는 이혼이 허락되었지만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이혼 하지말라고 권면하였다.
- 우상의 제물에 대한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8:1-11:1) : 각 민족들의 우상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각종 우상의 제물이 시장에 나와 있었으며 구별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 공중예배에 대한 문제을 고민하고 있었다(11:2-14:40) : 성찬의 문제와 여성 성도들의 문제, 은사와 직분에 대한 혼란이 교회 안에 있었다.
- 부활의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15:1-58) : 헬라 철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부활의 문제는 영적인 부분이기에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3. 나가면서
고린도교회는 상업적인 부유함과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세상 속에 있기에 세상의 영향력 속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말씀으로 바른 진리를 무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죄로 타락해 가는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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