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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07 사사기 주석및해설

사사기 서론 (1) - 연대와 주제와 배경 그리고 가나안 문화와 종교

by OTFreak 202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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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서론
사사기 서론

 

바로 직전에 위치한 여호수아서와는 달리, 사사기는 믿음을 잃고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고 그분의 대리자인 사사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사기에 대한 ESV 성경의 서론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사사기 서론 (1) - 연대, 주제, 배경, 가나안문화와 종교

 

 

저자와 제목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사기의 책명은 ‘쇼페팀’(שפטים, ‘지도자들’ 또는 '재판관들’)입니다. (열두 명의) 사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뜻을 지닌 '사사기'라는 제목은 이 히브리어 명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사무엘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 지도자들(재판관들)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법적인 문제점을 해결해 주고, 또한 적군이 침입할 경우에는 그들과 싸워서 몰아내는 일을 주도했었습니다. 사사기 자체는 저자에 대해서 밝히지 않습니다. 이 책의 어느 곳도 저자에 대해서 암시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열두 사사들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 및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 명의 저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사사기에 수록된 내용을 저술했을 것입니다. 후대의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사무엘이 사사기의 저자라고 합니다. 이 견해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사기의 저자를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저작 연대

 

사건들의 연대

사사기에서 언급되는 사건들은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주전 14세기 중엽 또는 13세기 말엽), 사무엘과 사울이 등장(주전 11세기 중엽)하기까지의 기간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작성 연대

이 책의 저술과 관련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는 이 책에 기록된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직후입니다. 곧 주전 11세기 중엽입니다. 만약 삿 18:30에서,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는 표현이 남유다 왕국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가리킨다면, 사사기의 최종 형태는 바벨론 포로 시대 이전에는 저술(또는 편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중팔구 사사기의 거의 대부분은 다윗 시대(주전 1010~970년)에 저술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사기의 머리말 부분에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1:21)고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성읍을 주전 1003년에 점령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그 성읍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성경 구절은 소수의 여부스 사람들이 그 성읍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해 줍니다(예, 삼하 24:16). 따라서 사사기의 내용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다윗 시대에 저술되었다는 견해는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제

사사기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생활과 영적인 삶이 점차로 혼돈과 배교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도하기 위해서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경건한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17:6, 21:25).

 

목적, 계기, 배경

목적 : 사사기는 종교적인 배교 행위의 결과를 보여 주며, 또한 이스라엘에게 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저술되었습니다. 만약 의롭고 경건한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면, 그는 백성을 하나님에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차분한 분위기-곧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함-로 마무리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사기의 거의 대부분은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여호수아 시대에도 그와 같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모든 시기에 여호 와에 대한 이와 같은 불순종은 지속되었습니다. 그 불순종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악화되었습니다. 사사기의 서론에 들어 있는 요약 설명(2:16~23)이 알려 주듯이,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여호와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또한 가나안 족속의 풍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순환적 또는 반복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종의 순환 형식으로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사건마다 이스라엘을 점점 더 깊은 타락과 배교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합니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렸습니다.

계기 : 사사기의 이야기들은 그 당시의 배교적인 상황에서 빚어진 것들입니다. 사사기는 왕정 국가 체제를 정당화하려고 저술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사기의 마지막 절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라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절은 만약 (의롭고 경건한) 왕이 이스라엘을 인도했다면, 그 당시보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곧 이 절은 그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사사기 다음에는 룻기가 이어집니다. 룻기의 맨 마지막 단락(룻 4:18~22)에는 족보가 소개되는데, 이 족보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4:22). 나중에 다윗은 매우 경건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룻기 다음에 오는 사무엘상 및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에서 다윗 왕가가 합법적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도록 복 주실 것입니다(삼하 7장) 하나님은 왕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처음부터 계획하셨습니다(창 17:6, 16, 35:11, 49:10). 또한 하나님은 왕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지시하셨습니다(신 17:14~20). 이 지시 사항은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이 왕과 국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던 가치관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왕을 뛰어난 용사로 생각했지만, 반면에 이스라엘의 왕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했습니다(신 17:18~20). 만약 그와 같은 왕이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면, 사정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실상,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거의 대부분은 여호와를 올바로 섬기지 않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배교 행위는 다윗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에 합법적인 왕권이 세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역사적 배경 : 사사 시대에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중대한 변천이 일어났습니다. 곧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1200년)가 지나가고, 주전 1200년 이후에는 초기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후기 청동 시대는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100~1550년)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들이 독립된 국가들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청동 시대에 그 작은 도시 국가들은 거대한 제국으로 대체되었습니다(예, 이집트 및 히타이트 왕국 등).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족속들은 외세로부터 어느 정도 괴롭힘을 받지 않으면서, 그 지역에서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산지에 살았으며, 반면에 가나안 사람들은 대체로 평지와 지중해 연안에 거주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 갈 무렵에,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 전체에서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파괴가 진행되었습니다. 고고학적인 증거 자료에 의하면, 주요 중심지들에서는 인구가 갑자기 줄어들었습니다. 반면에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산지 및 사막의 가장자리 등에는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도자기의 수입이 급격히 중단되었습니다. 거대하고 활기차고 화려했던 생활 공동체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농업이나 목축 차원에서의 문화는 지속되었습니다. 비록 세련된 제품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도자기는 계속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왜 그 당시 이 지역에 이와 같은 광범위한 파괴가 빚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 '육지와 해양 민족들의 이동'이라고 알려진 시기와 일치합니다. 주전 13세기 말엽에, 이 민족들은 이집트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민족들은 지중해 동쪽 해안 지역에서도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충돌 및 싸움으로 말미암아, 초기 철기 시대(주전 1200~1000년)는 일종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비로소 주전 1000년경에야, 지중해 동쪽 연안의 모든 지역에서 사해동포적인 문화가 다시 꽃을 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건설된 도시들과 주거지는 다시 후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들 및 주거지와 견줄 만했습니다.

가나안 종교와 문화 :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주요 문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서, 가나안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가나안 종교와 문화의 어떤 매력적인 요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거의 물리칠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교와 문화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요? 가나안 땅의 부요와 권세에 대해서 보고한 정탐꾼들의 이야기(민 13장)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열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광야에서 힘든 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땅에는 큰 도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지역에는 이 세상의 온갖 문물이 넘치고, 또한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측면-예술, 문화, 건축, 무역, 정치 체제 등-에서 이스라엘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의 정교한 종교 제도 및 의식에 미혹되었는지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외면적으로 판단할 때, 가나안 종교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주고, 심지어 제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나안 종교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이 종교 의식이 성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룩한 매춘 제도-바알의 '여자 사제들’-는 바알 숭배와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을 결합시켰습니다. 또한 그것을 허용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와 같은 가나안 종교의 특성에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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