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오늘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누가복음 1장 57절-80절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통과 혁신을 조화시키시고,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구원의 새 역사를 이루시는지 배웁니다. 이 설교는 현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성경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새벽설교로 정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57절-80절, 불가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 세례 요한의 출생
전통과 새로움의 만남
며칠 전 한 젊은 부부가 한 목사님을 찾아간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부모는 목사님을 찾아서 자신들의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하늘'이라는 이름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좋아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시댁 가문에서는 대대로 '철'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어왔어요. 영철, 정철, 민철..." 이 이야기를 듣고서 그 목사님은 그 순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가문의 전통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했던 그 순간이 말입니다. 이후에 목사님은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철하늘'은 어떠세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결국 그 아이의 이름은 '철하늘'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우스갯 소리로 하신 말씀 같지만, 때로는 전통과 새로움이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도 있나 봅니다.
사가랴의 고뇌와 이스라엘의 아픔
본문에서 우리는 깊은 고뇌와 고통 속에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가랴는 깊은 고뇌 속에서 침묵입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그는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이나 나이의 한계를 넘어선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사가랴는 자신의 불신앙을 매 순간 마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드러납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정치적 자유를 잃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깊은 어둠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전통이라는 무거운 짐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두고 벌어진 갈등은 단순한 이름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전통이 충돌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친족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정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직면한 아픔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는 본문에서 나타난 문제들과 놀랍도록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로, 소통의 단절입니다. 사가랴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일 뿐, 글자를 써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심각한 소통 자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넘쳐나는데도 진정한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둘째, 공동체의 해체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웃과 친족이 함께 모여 아이의 출생을 축하했지만, 오늘날에는 이웃조차 모르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교회마저도 개인주의가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셋째,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입니다. 교회 안에서 전통적 예배 방식을 고수하려는 측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측의 대립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이름을 두고 벌어진 갈등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더불어 영적 지도력의 부재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오늘날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도 세속적 가치에 타협하며 본질적 사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침묵에서 찬양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가랴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가랴의 침묵이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말을 할 수 없는 동안 사가랴는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을 때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통과 새로움의 갈등도 지혜롭게 해결하셨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새 시대를 여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으로, 이제 율법의 시대를 넘어 은혜의 시대가 열렸음을 예고했습니다. 친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뜻을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의 구원으로, 나아가 온 인류의 구원으로 은혜의 지평을 넓히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은 단순한 한 가정의 기쁨이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거대한 구원 계획의 시작이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모범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마태복음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보여주신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순교 소식을 들었을 때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마태복음 14:13).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사촌 관계를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과 가지셨던 깊은 유대관계를 보여줍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셨으며, 요한의 증거를 자신의 메시아 됨의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현대 교회의 회복을 위한 영적 자세
오늘날의 문제들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경우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또, 소통의 단절과 공동체의 해체 문제는 성령의 역사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가랴처럼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입술로 변화될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우리는 오늘도 겸손히 침묵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전통과 혁신의 갈등도 하나님의 지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리를 훼손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만 높이며,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함께 하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사가랴처럼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엘리사벳처럼 담대히 주의 뜻을 선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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