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태만한 신자들에게 복음의 위대함과 이 복음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기록한 신학적 논문이다. 이 서신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숭고한 계시와 모세 언약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우월성을 상기시켜 준다. 히브리서는 영적인 무관심과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려는 위험성에 대하여 언급하므로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지만 신앙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그래서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 버린 혹은 회심의 경험이 이미 시들어 버린 성도들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종교나 다른 영적 세계를 경험해 보기 위해 기웃거리는 신자들에게 꼭 맞는 서신이다. 히브리서는 복음의 약속을 버리고(4:1; 10:35) 구원의 빛을 외면하여(6:6) 신학적으로 표류하는 자들에게(2:1) 경고하고 있다. 저자는 옛 언약의 본문들과 모형들을 거듭 언급하면서 새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완전하고 충족한 구원자이심을 증명한다. 예수님의 위격과 사역은 유대교나 다른 어떤 종교가 주장하는 그 무엇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목차
내용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히브리서는 헬라 시대 당시 관례적으로 서신들에 쓰던 인사말과 저자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장소 그리고 이 서신이 어떤 상황에서 작성되었는지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서신은 이미 AD 2세기에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히브리서로 불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서신서가 구약의 내용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고, 또 수신자들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라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단지 디모데의 친구로만 언급되고 있으며, 추측컨대 그는 이달리야(Italy, 13:23-24)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의 어휘, 문체 그리고 이에 담긴 신학은 바울의 서신들과는 현저하게 차이를 보인다. KJV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지만 바울이 이 서신서의 저자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수세기 동안 누가, 아볼로, 클레멘트, 브리스길라 그리고 바나바 등이 가능성 있는 저자들로 제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자 확인 문제를 철저하게 탐구했던 3세기의 교부 오리겐(Origen)은 누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는지는 진실로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결론지었다(유세비우스의 Ecclesiastical History에서 인용). 이 결론이 오늘날까지도 가장 유력한 답이다.
저자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론의 한 부분에서 수신자들이 일찍이 좋은 출발을 보여 주었다고 표현하 고 있다(10:32), 그들은 옥에 갇힌 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 뿐 아니라 그들과 하나 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들은 비방과 박해 그리고 모든 소유를 빼앗기는 아픔까지도(10:32-39) 제자도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으로 여기며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믿음과 열정은 식어 버렸다. 그들은 함께 모이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고(10:23-25) 영적인 지도자들을 거부했다(13:7, 17), 히브리서의 내용으로 보아 이 서신의 수신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보다 안전하고 압박감을 덜 받는 유대교로 되돌아갈 것을 고려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영적 기쁨의 쇠퇴
구약성경 이래로, 영적인 삶의 개척지들은 영적 쇠퇴와 열정의 상실에 대한 문제들과 늘 씨름해 왔다. 때로는 영혼이 슬픔으로 인하여 녹아내리고(시 119:28), 시든 꽃잎처럼 말라 버린 영혼이 되기도 한다(사 61:3), 초대교회 금욕주의자들은 그것을 acedia(아케디아, 게으름, 나태함, 무관심 이라는 뜻의 헬라어에서 온 단어)라고 불렀다. 중세 시대에는 이것을 일곱 가지 치명적 죄악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회복이라고 하는 영적 캠페인을 통해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
여기서 떠나다 (turn away)의 헬라어 단어는 영어 단어 apostasy (배교)의 어원이 되는 말로 신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인류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재확인시키고, 또한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면서 그들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북돋우고 있다.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저자는 신앙 회복을 위해 3단계 방안을 제시한다. 이 방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의존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1:1-4:13), 예수님의 위격(person)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히브리서의 첫 네 구절은 강력한 찬송시적 고백으로 비교 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선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 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분이시다. 그분을 통해 천지가 창조되었고 만물이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었다(1:1-4).
이 사실은 예수님이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장은 다양한 구약성경 구절들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결코 천사들에게 사용하신 적이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분의 아들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한 아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천사들이 받지 못한 능력을 성부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우리는 천사와 같은 영적인 실재와 그 능력에 매료된 시대에 살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드려져야 될 경배와 순종을 신비적인 존재나 천사의 능력으로 돌리지 말 것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엄숙히 경고한다(히 2:1.3).
예수님은 세상의 영적인 지도자들이나 소위 도사(guru(구루, 힌두교 지도자를 일컫는 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분이시다. 유대인 독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위대한 조상 모세의 후손이라는 데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이 설계하신 만남과 교제의 장소에서 섬기는 종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종 이상의 신분을 가진 분이셨다. 예수님은 집을 지으신 분이고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집이 되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히 3:3)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곧 우리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을 우상화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인간 공동체와 개인적 친분에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나 공동체 자체를 집을 세우시는 건축자 이상으로 높이지 않도록 경고한다 (3:3-4).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단지 영적 실재나 영적인 지도자들보다 더 크실 뿐 아니라 영적인 규례들(Spiritual Disciplines)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시다(4:1-13). 안식일 준수는 할례와 함께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안식일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4:6).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신앙 회복 두 번째 단계는(4:14-7:28)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특별한 의상을 착용했고,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으며, 가장 중요한 직무로서 백성의 죄를 위해 대속 제물을 드리는 일을 수행했다. 히브리서는 이 직무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백성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셨다(4:14-5:10). 아론의 계열을 따라 제사장직을 이어받은 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늘로서 오신) 큰 대제사장...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이시다(히 4:14).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천상적 기원에 대해서는 7장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인 멜기세덱을 통해 설명한다. 멜기세덱은 구약에서 단 두 번 거론된 인물이다(창 14:18-20; 시 110:4). 아론의 제사장직과는 달리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그 기원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멜기세덱은 전임자도 없고 후임자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대제사장이셨다. 그분은 다른 대제사장들과 달리 자기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로서 온전히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7:26-28).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기독교 영성의 중요한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다. 영성 개발에 있어서 영적인 삶의 형성은 우리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보다 대제사장의 직무가 영성 개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의 직무는 자기 스스로 영적인 삶을 형성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던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드려지는 대제사장적 희생 제물이시다. 구약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희생 제물들이 최종적으로 죄를 사하는 것은 아니다(9:9-10; 10:1-4). 그것들은 단지, 단번에 (10:10) 죄를 제거하고 신자들을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로 회복시키는 미래의 희생에 대한 예표와 상징, 곧 그림자 일(10:1) 뿐이다. 그 완전한 희생은 예수님이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을 때(히 10:12)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신앙 회복을 위한 진술의 세 번째 단계에서(8:1-10:18),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먼저,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첫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8:13) 선지자 예레미야가 미리 본 새롭고 더 좋은 언약을(8:1-13) 출범시키는 데 아주 완전하고 효과적이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죽음은 단번에 모든 죄를 해결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계속 반복되어야 했던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희생 제물은 불필요하고 헛된 것이 되었다(9:25-10:7). 그리고 신자들은 이제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만난다(9:1-14). 구약의 회막(tent of meeting)은 문자 그대로 신자들과 예수님의 만남과 관계의 장()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희생은 동물의 희생으로는 이룰 수 없는, 자유로운 도덕적 대리인(a free moral agent)으로서 그분이 모든 구원 사역을 이미 알고 계신 가운데 드려졌다. 따라서 이것은 완전하고 자발적으로 드려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일치하는 희생이었다(10:9-10).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희생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바꾸는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성 개발의 필수적 요소인 영적 전환이다. 이 영적 전환은 영감을 따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신실한 헌신을 약속해야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다. 영적 삶의 진보는 자동적인 진화과정이 아니다. 결혼과도 같이 의식적 헌신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히 12:1-2).
땅의 진동과 소멸하는 불
그리스도의 위격, 제사장직 그리고 희생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삶을 이루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 세상의 파멸을 묘사하는 두 이미지, 곧 땅의 기초가 진동하는 것과 소멸하는 불의 모습을 기록했다.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7-29). 이 구절들은 두려움과 공포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원을 나타내는 이미지로서 기록된 것이다. 소멸하는 불은 하나님의 형벌이나 고문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불신과 같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불이다. 이 불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영원히 하나가 된다(2:11).
- 제임스 R. 에드워즈(James R. Edwards)
히브리서 연대기
- AD 30년 : 그리스도의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스데반의 순교
- AD 32년 : 사울의 다메섹 회심
- AD 44년 :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 AD 47-48년 :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 AD 50-52년 :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 AD 53-58년 :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 AD 58년 : 바울의 체포
- AD 61년 : 바울의 로마 투옥
- AD 64년 : 네로의 박해
- AD 67년 : 바울의 순교
- AD 70년 : 예루살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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