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성 개발을 위해 쓴 편지다. 본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웠고, 또한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적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바울은 몇몇 특별한 문제들을 예로 들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 통일성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잘못된 행위를 고치고 서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훈계한다. 바울의 이러한 훈계는 자신들은 이미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의식으로 가득 찬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목차
바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하고 촉구하며 더 나아가 명령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고린도전서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창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세워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교회에서 교만해진 자들이 벌이는 다툼과 그 고린도 교회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 서신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긴장 가운데 믿음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 교회를 세운 바울은 멀리서나마 그런 어려움을 겪는 고린도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고린도 교회에는 어떤 영적 지도자를 따를 것인가에 대한 분열을 비롯하여, 잘못된 확신에서 돌출된 문제들, 성적으로 올바른 행실, 위임된 직임에 대한 동등한 인정, 성찬식을 위한 구성 요소, 영적 은사의 적절한 사용, 예배드릴 때 지켜야 할 질서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요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심각한 불화가 있었다. 본서는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범위와 충만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교회에게 보낸 문서다.
고린도전서 바르게 읽기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한다. 그래서 본서를 마치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정답들을 적어 놓은 목록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를 사도적인 해답으로만 읽는다면, 본서가 영성 개발에 도움이 되는 심오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정답 그 자체를 넘어선 대답을 한다. 곧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쪽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쪽으로 선택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또한 본서를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위한 충고를 담은 서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본서에서 고린도 교회 전체 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용납하라고 권면한다(7:28, 36-38; 10:31), 고린도후서 2:5-11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의견을 말하는 것을 종종 허락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전과는 다른 태도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바울이 제시한 어떤 충고들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믿음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다 보면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교인 상호 간에 계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교역자와 성도들이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며 노력하다가도 그만 성급한 대화로 좋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성급한 대화로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우리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본서는 우리에게 대화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때때로 자신의 확신을 희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잘 보여 준다. 아울러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특별한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상황에 곧바로 적용하려다 보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복음과 바울이 확증한 기본적인 자유들마저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영성 개발을 위한 주제들
고린도전서는 영성 개발을 위해 본서를 고찰하는 독자들에게 몇 가지 유익한 주제들을 제공한다.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하나님만이 성령으로 사는 삶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본서의 가장 첫 부분에 기록된 감사의 글에서부터 믿음의 삶 가운데 주어지는 모든 은혜를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권(saving initiative)에 근거한 것으로 돌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은혜를 주시며 강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도록 은사를 주신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은사를 주시는 대행자시다(1:1-9; 2:4, 10; 6:14;8:6; 12:4-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지혜, 통찰력 혹은 영적 능력을 자신들이 본래부터 소유했던 능력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는(고전 1:29) 말씀을 통하여 은사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아주 분명하게 그분을 나타내셨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구원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근원이시며(1:30) 세상의 지혜와 반대되는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결정하시는 분이다(1:21-25). 또한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분이며(3:6-7),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고(5:13), 모든 영적 은사들이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도록 주장하시는 분이다(12:6).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 말하면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잘못 전하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생명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로 인해 바울이 겪었던 고통은, 그들의 방종과 잘못된 행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두 번째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비록 한 개인이 단독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교회는 단순히 개개인의 집합체로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신실성은 공동체의 삶의 질에 달려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복음이 제시하는 올바른 인간관계로 이끌기 위해 개인적인 행위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마 합당치 않은 방식으로 성만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훈계가 될 것이다(11:27). 오랜 세기 동안 어떤 이들은 이 본문에 근거하여 성만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그러나 본문은 사회적 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성만찬의 잘못된 방식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바울은 근친상간에 관한 유대법을 어긴 자에 대해 단순히 그 개인이 범한 도덕적 범죄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긴 자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애통하도록 돌보지 않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한다(5:1-2). 어떤 공동체가 그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위험에 방치하거나 그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귀찮게 여긴다면, 그런 공동체는 진실로 건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공동체로서 세상에 설 수 없다.
세 번째 주제는, 교회의 내재적 죄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공동체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문제들을 공동체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교회 공동체는 교회 밖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전의 생활방식에서 철저하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으로 세워진 새로운 실재를 반영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바울의 요구를 따른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귀족계급 제도와 긴밀하게 얽힌 가정생활과 경제 활동의 특징들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는 반기를 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고대 지중해권 문화에서는 한 단체의 필요가 항상 개인이나 가족들의 필요보다 우선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었다(7:15, 22; 9:19; 11:11-12).
복음에 합당한 삶
바울은 남녀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복음에 합당한 삶은 새로운 사회적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몇몇 가르침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울 정도로 공정하다. 예를 들면, 교회 안의 어떤 자들은 성적 절제가 결혼한 자나 결혼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마땅히 모든 교인들에게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부도덕한 행위를 막기 위해 성적 절제를 동의하지 않는 반면에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라고(고전 7:4-5) 덧붙이고 있다. 또한 여인들이 예언할 때 머리에 마땅히 수건을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언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11: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에 대해서는 14:33-35의 주해를 보라).
당시 로마에는 부()와 사회적 신분을 인정하는 엄격한 사회계층 구조가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으로 모인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회계층 구조를 답습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린도 교회가 성만찬을 위해 모였을 때 성만찬 직전에 부유한 교인들은 식당에서 풍족하게 먹었을 뿐 아니라 어떤 자들은 술에 취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나 조금 먹는 정도였다. 당시 세속적 모임과 다를 바 없었다(11:21).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것이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인들이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고린도전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바울의 하나님과의 교제로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의 넘치는 정열과 교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 바울의 넘치는 힘과 열정은 신앙생활에서 얻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그의 간절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참된 기쁨은 피상적인 감정에 의한 것도 아니요, 억지로 명령에 복종함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참된 기쁨은 고난과 사랑을 경험할 때 절로 우러나온다. 다음과 같은 말씀들 배후에 있는 기쁨의 순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본 서신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때때로 바울은 그의 순수한 송영 (doxology) 때문에 자신의 논쟁의 흐름을 깨뜨린다는 점이다. 다음이 그 예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6-57).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연구하려는 자들에게 아주 영향력 있는 문서다. 본서에는 예배 의식의 기본이 되는 말씀들이 수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계속 읽고 암송한다. 다음 구절들을 함께 읽어 보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3-26).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렇게 애송되는 구절들이 있는 반면에 논쟁이 될만한 구절들도 종종 눈에 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씀들을 주목해서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출교에 대한 엄한 명령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행위들의 목록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고전 14:34) 말씀 등이다.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심지어 화나게 할지라도 그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영적으로 성숙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기술(skill)이다. 바울이 자신의 본심과 달라 보이는 감정과 말씀을 조화시키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역시 합리화나 회피하는 방법으로 바울서신의 강도()를 유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울서신의 첫 번째 독자들인 고린도 교인들처럼 배우고, 논쟁하고, 경청하고 그리고 바울의 열정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말씀에 응답하고자 하는 자세로 고린도전서를 대해야 한다.
- 케서린 테일러(Catherine Taylor)
고린도전서 연대기
- AD 30년 : 그리스도의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스데반의 순교
- AD 32년 : 사울의 다메섹 회심
- AD 44년 :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 AD 47-48년 :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 AD 50~52년 :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 AD 53-58년 :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 AD 58년 : 바울의 체포
- AD 61년 : 바울의 로마 투옥
- AD 64년 : 네로의 박해
- AD 67년 : 바울의 순교
- AD 70년 : 예루살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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