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공부/내 마음대로 공부하기

출애굽 사건, 과연 역사인가 신화인가? 그 타협점은 무엇인가?

by OTFreak 2021. 4. 27.
반응형

   출애굽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과 설명은 어떠할까요? 이 설명이 유대교의 전체를 대변하는 설명은 아니지만, 출애굽에 대한 유대인들의 중요한 해석들 중의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역사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일종의 신화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출애굽,유입설,침투설,타협적이론,두그룹,문제점,모순점,열가지재앙,역사,신화

 

   창세기는 야곱이 그의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창세기 첫 장에서는 70명의 야곱 가족들이 어떻게 애굽 왕들에 의해서 비참하게 노예가 된 상태에서도 큰 민족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노예로서의 삶이 오히려 이스라엘 국가를 형성하게 하는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400여년의 세월 동안 애굽인들과 바로에 의해 고통 당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레위 지파의 모세가 바로의 집에서 자라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능하신 하나님,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까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은 몇 개의 극적인 장들 속에 나타납니다. 60만명의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 자유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애굽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심판하셨고, 홍해에서는 병거와 기병으로 따라온 바로의 군대를 익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데리고 오신 후, 열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번째 계명은, 히브리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주 하나님이다. 속박의 집에서부터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내 앞에서는 다른 신이 절대로 없어야만 한다."(출 20:2-3).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년을 지내다가 가나안 땅 경계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강하고 단결이 잘되는 나라가 되었으며 약속의 땅을 정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유입설,침투설,타협적이론,두그룹,문제점,모순점,열가지재앙,역사,신화

 

출애굽은 역사인가?

   출애굽기의 역사적 타당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성경의 내용과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애굽의 영향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과연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었는가에 대한 애굽에서 발견되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하나의 국가가 노예로부터 시작하였다고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조상들과 자신들의 국가의 기원을 과대 포장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다른 국가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노예였었는가?

   애굽이라는 국가의 구조 속에서 노예 제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전 14세기 중반에는 애굽에 어떤 형태의 유일신 숭배가 아케나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것이 유대교의 유일신론의 근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 전쟁과 거대한 건축 사업을 많이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람세스 2세(주전 1290년-1212년)가 통치했던 때인 출애굽기의 시대는, 노예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시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유일한 애굽의 자료는, 메르넵다의 통치 5년(주전 1207년 경)에 세워진 석비에 기록된 그의 많은 승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쉬켈론(Ashkelon)은 사로잡혔고, 게제르(Gezer)에서 포위되었다... 이스라엘은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들의 씨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석비는 당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석비에서 언급하는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단정 짓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기에 관한 부분입니다. 만일 성경의 기록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부터 나왔다면, 그들의 출애굽의 시기는 주전 13세기 말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월절에 있었던 이적들을 설명하기

   하지만, 이 하나의 사실이 신비한 내용들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분명히 철저한 전통적인 전승에는 성경에 묘사된 모든 이적들을 글자 그대로 확신하고 받아 들입니다. 기적적인 사건들을 합리화시키고 자연스럽게 설명하려는 학자들의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애굽에서 홍수와 가뭄, 노예의 반란과 침략 등의 고대 재난을 이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들이 설명하는 재난들이 바로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이 아닐까요? 또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가 익사하게 되는 것은 나일강과 시내 광야 사이의 늪에서 일어나는 썰물과 그 흐름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요?

 

출애굽에 대한 문제점과 모순점

   일부의 학자들은 출애굽의 역사적인 타당성을 완전히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푸-웨(Ipu-wer)의 이야기에서는, 주전 3천년 말의 애굽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성경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계수한 것이 아닌 "장정 60만명"이라는 말은 곧 200만 명의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규모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더불어 애굽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났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문헌과는 다른 일종의 민담의 전형적인 특징과 관련하여 많은 모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에 관한 타협적인 이론들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출애굽에 관한 견해들 사이에는 몇 가지의 타협적인 이론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출애굽 가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땅에서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눠서 떠났으며, 두 번째 그룹은 주전 13세기 중반에 출발했을 당시에는, 이미 첫 번째 그룹은 가나안 땅, 특히 사마리아의 세겜을 중심으로 주변을 장악하고 정책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많은 인구가 조직적으로 애굽을 벗어난 적은 없고, 오히려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다니면서 이미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어 있는 가나안 땅에 서서히 침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서로 다른 셈족 출신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가나안 땅으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