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족보를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안내한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에 대한 헌정사로 시작하여, ‘차례대로 써 보내는' 글을 우리에게 제공할 요량임을 알려 준다. 이 두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배경 자료들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게 해 준다.
목차
요한복음은 매우 부드럽게 시작한다. 운율이 느껴지는 요한복음의 글은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렁찬 목소리로 선언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목자나 천사나 아기의 모습을 다루느라 뜸을 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발코니에서 깊은 수영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한 덩이 얼음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막 1:1) 곧장 이야기한다. 이 놀랍도록 복된 소식의 영향은 이내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간다. 5절에 이르면 신약성경에서 가장 야성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 요한과 대면하여 세례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회개(돌아서서 마음의 변화를 가지는 행위)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요한의 시작 메시지와 그 속에 나타난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통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세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마가복음 1:2-3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놀라운 도래(到來)가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도래를 계획하신 것이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수세기 동안 이 새로운 현실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개역개정 성경)
이 선언은 그저 하나의 뉴스 속보가 아니다.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깨어 움직이기를 요청하고 있다.
본문 속으로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세상 속으로, 또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통치는 결정적이면서도 극적인 것이다. 갑작스레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분이 우리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온 날과 그 순 간까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든 없든 혹은 중생한 이후부터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든 안 계 시든 간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는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분의 삶을 이해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시고자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역동적인 기록, 세밀한 묘사
마가복음은 전체 줄거리를 서둘러 끝내려는 듯 숨 가쁘게 이어진다. 마가복음에는 곧 '즉시’, ‘그리고'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꽤 여러 인물이 매우 빈번하게 본문을 들락거린다. '길에 계시는 예수님과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여러 지역에 발을 디딘다. 현대인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저마다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다니며 분주하게 살고 있다. 너무 바쁜 나머지 개별적인 일이나 장소나 사람이 우리 삶에서, 심지어는 우리를 초월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체 이야기에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를 통해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내용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할지라도 더욱 주목해서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기 위하여, 길을 따르는 와중에도 매 지점마다 잠깐 쉬어 가는 것은 필요하다.
마가는 이곳저곳의 세부 사항들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히 말해 준다. 우리가 모든 것, 심지어는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도 눈여겨보게 하기 위해서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수선하는 동안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던진다(1:16-20). 예수님은 광풍 중에 배에서 주무시며 고물에서 쉬고 계셨다(4:38).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아팠다(5:25). 배불리 먹은 5천 명의 사람들은 풀밭에 100명씩,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6:39-40).
마가는 또한 감정의 세밀한 면까지도 묘사한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며, 강하게 경고하기도 하시고, 분노 가운데 돌아보기도 하신다. 또한 탄식하기도 하신다. 긍휼과 분노와 사랑과 비통함을 느끼기도 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한숨을 짓기도 하신다. 이렇게 감정의 세밀한 면까지 묘사해 주므로 믿음은 삶의 실제적인 사건들에서 형성되며, 또한 믿음으로 살다 보면 우리나 하나님에게 온갖 종류의 감정과 반응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초월해 계시지만 성육신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마가복음의 기록자는 누구인가?
마가복음은 4 복음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정확한 기록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60년대와 70년대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또 다른 초기 자료들을 사용했겠지만, 기본 구조는 마가복음으로부터 차용한 듯하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이 다른 자료를 'Q' 자료라고 부른다. 이 자료에는 예수님의 어록과 교훈이 마가복음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마가복음과 함께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공관복음'(synoptic Gospels)이라고 부르는데, 세 복음서 사이에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마가'(Mark)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가가 베드로를 알고 있었으며, 그가 목격자였던 베드로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순서대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생각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가 기록한 4세기의 한 문서는 2 세기부터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로 언급돼 왔다는 파피아스(Papias)의 말을 인용한다. 신약의 여러 서신서에는 마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오지만, 개개인의 '마가'가 동일한 인물인지, 또 마가복음의 저자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마가를 유대인 신자라고 주장한다. 그가 헬라어 본문에서 유대 관습을 설명하고 히브리어를 번역한 부분을 증거로 들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유대 관습을 설명하는 마가의 말이 어색하다면서 오히려 동일한 증거로부터 마가는 이방인 신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가가 이토록 익명의 존재가 된 이유는 자신의 관심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저자의 신원을 결론 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음서가 의도한 첫 번째 청중이 누구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마도 마가는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이 복음서를 쓴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마가가 베드로가 죽기 직전이거나 직후쯤에 네로 황제 통치 하에서 박해받는 로마 신자들을 위해 썼다고도 믿는다. 더러는 팔레스타인이나 수리아 지역에 사는 이방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들은 대부분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자'와 '청중'의 신분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마가가 복음서(Gospel)라는 문학 장르 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을 때 '새로운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마가복음 내용 엿보기
마가복음의 구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가복음을 구조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인데, 8장까지는 대체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분에서 예수님은 널리 여행을 하신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악한 귀신들을 쫓아 내시며,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시고, 반대에 직면하신다. 동시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때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준다.
그다음 마가복음 8:27에서 예수님이 질문하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중의 의견을 전한다.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먼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뒤따라 나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메시아가 되고자 하시며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계시다. 이 시점을 전환점으로 해서 이야기의 전개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간다.
9장부터는 줄곧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게 된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8:31; 9:31; 10:33-34) 제자들에게 '인자'인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막 8:34)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메시아 직과 그들의 제자도 사이의 완벽하면서도 불편한 관계를 주의 깊게 연결 지으셨다. 세 번의 수난 예고 뒤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질문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직과 그들의 제자도 사이의 완벽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소경을 고친 두 편의 기사 사이에 세 편의 수난 기사를 배치함으로써, 제자들의 몽매함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치신(8:22-26) 후에 여리고 변두리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다(10:46-52). 이 마지막 기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소개되는 유일한 이야기이자 마지막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을 크게 구분했을 때, 다음과 같이 적절한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 1:1 - 8:26 능력과 권세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이적을 행하심
- 8:27 - 29 전환점
- 8:30 - 16:20 수난-참된 메시아직과 참된 제자도
마가복음의 독특한 기록법
마가복음은 이중 강조법을 채택하는데,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다. 마가복음을 읽어 가다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때로는 권세자들과 격돌하신다. 또한 율법을 사랑보다 우위에 두는 관습과 관행에 도전하시고 그것을 전복시키신다. 세상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부정한 자', '버림받은 자', '죄인'이라고 명명하고 무가치하다고 평가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제자도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포함시키심으로써 환대하고 사랑을 넓히시고 확장해 가신다. 예수님은 이 모든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확립해 가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세자들의 손에 수난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과 권세로 메시아의 편견 없는 은혜와 자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을 계속 압제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십 자가에 못 박히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끝이 아니었듯이 이 이야기의 끝도 아니다.
마가복음에서 두 번째 강조하는 것은 '제자들'이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는 신실함의 모델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신실함을 추구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예수님을 오해했다. 그리고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뭇사람의 끝이 되고,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자는 누구며 또한 그들이 '영광 중에' 보좌 우편에 앉을 수 있겠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잠을 잤다. 복음서 끝부분에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겼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는 모두 도망쳤다.
이러한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에서 위로를 얻을지도 모른다. 만약 예수님의 삶과 신실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자도의 유일한 표준이라면 우리는 매번 부족할 뿐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시지만, 우리는 그분처럼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마가가 대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해가 둔하고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제자들과도 같다. 우리는 이해가 더디고, 의심하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고난과 수치보다 영광을 더 좋아한다.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할 때 잠을 잔다. 때때로 배반하고, 부인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신다. 그분은 우리를 앞서 가시고 우리는 그분을 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나아가도록 재촉하셔서, 갈릴리 뿐 아니라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라도 그분을 만나도록 하실 것이다.
갑작스러운 종결?
마가복음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마지막도 갑작스레 끝난다. 대체로 학자들은 마가복음 16:8인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가 원래 마가복음 끝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처럼 갑작스럽게 여인들의 침묵으로 끝을 맺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불완전하게 보여서 이후에 두 종결부가 첨가된 것 같다. 첨가된 두 종결부의 문체나 어조가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과 얼마나 다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첨가된 구절들이 원래 사본에서 잃어버린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마가는 '복된 소식'을 결코 이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종결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이 한 구절이 마가복음의 전문이라 한들 어떻겠는가? 16장 모두가 오직 이 같은 시작을 의미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불완전한 종결은 실수가 아닐 것이다. 마가복음은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완성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역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다. '돌이켜’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우리 자신이 용서받고 사랑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와 온전함을 위하여 일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제한하는 율법주의를 타파할 때, 비로소 이 이야기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포괄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아무도 부정하거나 버려진 사람 또는 죄인으로 취급당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가 제자도 속으로 그리고 도래한 하나님의 다스림 속으로 환대를 받게 될 때, 복음서는 우리 가운데 계속되는 것이다.
나가면서
마가복음은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해 바쳐진 책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초청하며,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이 복음서는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해 손쉽고 논리 정연한 결론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안에서 우리 역시 빈 무덤과 대면하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면서 영성 개발의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 킴벌리 클레이튼 리저(Kimberly Clayton Richter)
마가복음 연대기
- BC 37년 : 헤롯의 유대 왕 즉위
- BC 5년 : 세례 요한의 출생
- BC 4년 : 예수의 탄생, 헤롯의 유아 학살, 헤롯 왕의 사망
- AD 8년 : 어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 AD 12년 :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 황제 즉위
- AD 26년 :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본디오 빌라도의 유대 총독 부임
- AD 27년 : 예수의 공생애 시작
- AD 30년 : 예수의 수난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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