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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신구약성경 주석 내용요약

12. 임마누엘! 성육신으로 함께 하시다 - 사복음서

by 구약장이 2020.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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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민족 지배를 받고 나서도 그 땅을 다시 점령했다. 이제 이어질 사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임마누엘 ,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포괄적 공동체를 형성하심을 볼 수 있다.

 

12. 임마누엘! 성육신으로 함께 하시다 - 사복음서
사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임마누엘의 은혜

 

목차

     

    성경본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12. 임마누엘! 성육신으로 함께 하시다 - 사복음서, 인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개역개정 성경)

       사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은 한 인간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맺으셨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그분만의 방식으로 활동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죽음과 부활이 바로 그 내용이다. 에덴동산에서 직접적이고 친밀하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이 시기에도 동일하게 나타나셨는데, 육체를 입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아이로 태어나셨고, 십대를 거치셨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그 마을의 목수로 일하셨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랍비셨다. 비록 외인(outsider, 요 1:46)으로 태어나셨고, 당시 제도권이 공인한 그 어떤 권위도 없이 사역하셨지만, 분명 예수님께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분 안에 있는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와 능력(the kingdom and power of God)이 사람들을 그분의 영향력 아래로 모이게 했고,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은 예수님을 통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눅 16:16).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38, 개역개정 성경).

       예수님은 공공장소에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사역하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반응을 보인 소수의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해 훈련시키셨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능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을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낸다. 아울러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오늘도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심으로써 모든 인류는 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분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가능해졌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적 기도문에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처럼 세상 중에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요 17:6). 그리고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 되게 하시려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 개역개정 성경)

       예수님은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닌 바로 그 시점에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역사의 모든 사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을 위해 모든 인류가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전 시대에 백성과 '함께' 하셨던 방법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경험했던 모든 삶을 통해 이 모든 준비를 이루어 놓으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찼다. 그것은 '충만한 때'였다. 이때 오신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요 14:9; 참조. 막 1:15; 갈 4:4).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삶 속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구현(具現)하셨고 또한 본이 되셨다. 군중 앞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진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은 역사라는 드라마 가운데 새겨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수님은 모든 인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셨다.

       예수님은 신중하게 선택하신 소수의 제자들을 양육하고 돌보심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시작하셨는데, 바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 오늘도 이 사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며, 앞으로 이 사명을 짊어지고 나갈 다음 세대를 기다리고 있다.

       복음서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주된 형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사람들(people)을 제자(disciples)로 부르셨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학생(Student) 또는 수습생(apprenticeship)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의지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셨다. '제자도'(discipleship) 란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변화와 인격적인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온전한 해답을 찾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생명과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 사함을 주 신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자 영원한 '스승' 이 되셔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모든 것을 직접 배울 뿐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공동체, 사랑과 진리와 능력을 나타내는 공동체를 세우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 곧 제자로서의 삶은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본적인 형태다. 독특한 역사적인 실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렇게 초자연적인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올바른 제자도를 익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제자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끊임없는 영적 전쟁과 같다.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십자가 군사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웃고 넘길 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진보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교만한 인간에게는 가장 위협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동시에 다른 면에서는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권세'(요일 2:16; 갈 5:16-17; 벧전 5:8을 보라)에 대항하는 영적 전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서와 그 이후에서도 영성 개발의 필수적인 부분이며(요일 2:15) 제자도와도 밀접하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4, 개역개정).

       복음서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와 '사람으로부터냐'에 대한 싸움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주제다(마 21:25). 슬픈 사실은 제도권에 속한 종교 기관들이 종종 하나님 편(divine origin)보다는 인간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눅 13:34; 참조. 렘 35:14-15). 유감스럽게도 기독교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래로 하나님이 보내신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관장해 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지양해야 할 바다.

       '하나님 백성'을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개념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문화적 형태나 심지어 종교적인 형태까지도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태복음 8:11-12, 개역개정 성경)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누가복음 16:16, 개역개정 성경)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태복음 21:43, 개역개정 성경)

       이러한 말씀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위에 두는 세상의 모든 문화를 향해 주시는 말씀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다

       복음서에서 두드러지는 십자가 사건과 이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투쟁 때문에,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인정한 사실은 묻혀 버리곤 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대중들의 압도적인 인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겪었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 게 되었다. 마침내 때가 이르러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인식했다. 비록 그들이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공적인 기록으로서 이 세상에 효과적으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그분은 '땅에서 들렸고(lifted up), 모든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이 '그분께 이끌려 나오게(drawn to him) 되었다(요 12:32). 그리고 그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제자들의 그룹이 형성된 후, 그들은 변화되었고 성령강림을 통해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생적인(self-replicating) 힘을 얻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었다(행 1:8; 10:1-11:18).

     

    영성 개발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이다.

       이제 '영성 개발'의 의미가 아주 명확해졌다. 제자들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마 28:20) 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이란 우리 속 사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행동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을 말한다. 영성 개발은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행위를 중시하다 보면 극단적인 율법주의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그리스도인의 영성 개발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라는(눅 6:43) 말씀에 근거하여 '좋은 나무'가 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고도 '자동적으로(automatic) 순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영성 개발이란 내면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Christlikeness)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조 이래 하나님이 목표로 삼으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될 때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연합을 통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포괄적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갈망하는 완전함(wholeness)이요, 또한 거룩함(holiness)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함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자격을 갖추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신' (ambassadors for Christ)으로서 지금 여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고후 5:20; 빌 2:15).

     

    사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가 진행 중이다.

       당시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두 가지 주요한 한계점이 있었다.

       첫 번째 한계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을 조성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는 메시아가 급진적인 정치 개혁과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가져오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와 견해는 사람들이 천국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능력 있고 확실한 분이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의 행동이나 가르침 모두 당시의 문화적 전제들을 통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 단계 앞선 중재가 필요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셨다. 그래서 부활과 오순절 그리고 사도행전 가운데 전개되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메시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심어 주셨으며, 그 사역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두 번째 한계는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 그리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곧 신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스스로 부과하셨던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빌 2:5-8). 이 자유를 통해 그리스도는 인격체로서, 제자들의 내면의 삶과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실 수 있게 되었다(예를 들어, 요 14:15-26; 행 6:7; 19:20; 골 3:16; 딤후 2:9). 그러나 복음서는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생생하게 전해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역사의 과업은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무얼 배우나?

       이 시점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몸을 포함한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아름답고 능력이 있으며 거룩하다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영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장소다. 하나님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성육신하셨다. 물질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전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연합된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장소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모든 세세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는다(마 6:33). 우리의 영성이 개발되면서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전해지고, 우리의 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뿐 아니라 그 열매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게 된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 출생과 성장,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예기치 못할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만약 완벽하게 이해되고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제안이나 계획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역사나 개인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은 항상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5:8, 개역개정 성경)

       하나님은 나사렛의 목수에서 랍비로 변신하신 예수님에게 그분의 생각과 길을 계시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각과 길은 항상 예수님의 생각과 길을 인도하셨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완전한 계시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제자도는 종교적인 관습이 아니라 성육신 되어 몸에 익은 것을 의미한다. 내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의식이나 도덕적인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인 것이다. 속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는 것은 가정과 직장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이 사시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마지막 공생애 3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감독 아래서 돈을 잘 관리함으로써 어떻게 하늘의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배운다. '아주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은 '큰일'에도 신실하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준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의 소유인 '진정한 부'를 관리하는 큰 책임을 맡기실 것이다(눅 16:9-12).

     

    나가면서

       태초에 우리는 에덴동산에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 동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에덴'은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위하여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능력을 따라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골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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