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동체 한가운데, 최고 보존자로서 영광스럽게 거하시는 분이십니다(엡 2:19-22; 3:10),
성경은 천지창조 이후 에덴동산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이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족, 부족, 민족, 모든 인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역사적인 다양한 공동체 형성 과정을 탐구하는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배운 것들을 우리 자신의 영성 개발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것을 적극 제안하고 있습니다.
목차
■ 고난의 신비 가운데 함께하시다
1. 성경 본문
욥기, 탄원시편들(3-7, 10, 12-14, 17, 22, 25-26, 28, 31, 35, 38-44, 51-61, 64, 69-71, 74, 77, 79-80, 83, 85-86, 88-90, 94, 102, 109, | 120, 123, 126, 129-130, 137, 139-143편),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2. 들어가며
지금까지 확립된 국가의 영광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의 깊은 신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게 될 것입니다.
(1)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성경의 중심에는 우리가 가장 깊은 좌절과 고난을 겪을 때에도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실재(reality)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이 질문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당혹게 합니다. 특별히 이 질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 몇 구절만 생각해 봅시다.
시편 기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며(시 59:1-2) 하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시 69:3) 말하고 있습니다. 또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인간의 죄악이나 개인의 범죄 또는 집단적인 불의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논쟁을 벌이는 욥기를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구절들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많은 경우 고난은 그냥 '존재한다'(is)고 가르칩니다. 고난의 신비는 인간의 지각 능력 밖에 있습니다. 고난의 존재는 그 어떤 궁극적인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하나의 실재(reality)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만큼 인간은 지성의 한계를 경험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게 하셨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성이 더 깊어지도록 항상 인도해 주십니다.
(2) 왜 나에게 고난을 주시나이까!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경의 저자들은 고난의 실재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구약성경의 몇 가지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에 도전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번영과 의 또는 불행과 진노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삶이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함으로써만 대면할 수 있는 신비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욥의 친구들이 주는 단순한 답변들이나 심지어 욥 자신이 말한 최고의 해명을 통해서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실은 욥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며 이해의 경계를 부숴 버립니다.
결국 고난은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인간과 열방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성경 전체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1-8).
시편의 애가들을 보면 어떤 왕과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운명을 조정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난에 대해 분노와 복수심 또는 절망적인 감정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적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자신들의 사정을 하늘에 탄원하고 탄식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많은 경우 이러한 상황들의 원인은 절망적으로 보이고 이때에 하나님의 모습은 냉혹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변함없이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라는(시 9:7) 사실을 고백합니다.
전도자라 불리는 전도서 저자는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했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덧없는 것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1-2).
그의 질문들에 답하려다 보면 오늘날 우리까지도 난처한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선행과 악행 사이의 차별성이 무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왜 우리는 선하게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요? 이 땅에서 분명한 보상이 없고, 다가오는 세상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무엇 때문에 의를 추구해야 할까요?
이러한 당혹스런 질문에 대한 전도서 기자의 결론은 대답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예레미야애가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이 그들의 범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토라의 가르침으로 돌아오라며 토라의 교훈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분명 범죄의 결과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애 1:1-9).
사회가 질서를 잃으면 범죄가 횡행하게 됩니다. 창세기 첫머리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자 곧이어 인간들도 서로 멀어지게 된 사실을 배웠습니다(창 3-4장), 예레미야애가서에서는 이 진리를 끔직한 결과와 함께 강력한 어조로 계시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범죄의 결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비극적인 사건이 정말 발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임한 무시무시한 결과이며 다루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고 그들과 같은 상황에 있는 우리 또한,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라며 울부짖게 됩니다.
(3) 고난도 유익을 주는가?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많은 경우 고난이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을 주며, 그분의 성품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을 이해 하도록 돕는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가 제의법이나 정결법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엄격한 준수와 실행을 통해 영성을 규정했는지 보았습니다.
토라는 하나님 앞에 있는 백성의 의를 평가할 수 있는 가늠자(measuring stick)를 제공합니다. 만약 그들이 토라의 교훈을 지키면 그들은 건강과 부귀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에는 욥이 등장합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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