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적게 읽히지만 가장 많은 두려움을 주는 책이다. 이곳엔 사악한 괴물들이 가득하며, 선한 인물들조차도 기괴한 생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4장에서는 각기 6개의 날개와 사방에 귀를 가진 사자, 황소, 인간의 얼굴, 독수리가 등장한다(계 4:7-8). 게다가 본서의 배경들 가운데 일부인 유리 같은 바다, 무저갱, 피의 강들도 예전엔 우리가 전혀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괴물들의 행동은 자주 일관성이 없고 각 행동들 간에 서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한순간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합창 소리를 듣다가, 다음 순간에는 천사들이 이 땅과 그 거민들에게 무서운 재앙들을 선언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늘 그려 오던 예수님마저도 이 환상 속에서는 이상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피에 젖은 죽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예를 들어, 5:6) 나타나며, 이후에는 눈이 불꽃 같으며, 피 뿌린 옷을 차려 입고,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뻗어 나오는 용사로 나타난다(19:11-16).
그러나 요한이 황량한 화산섬 밧모의 감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약 당신이 환상을 목격한다 해도 그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당신의 취향과 기분에 맞는 영화를 고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타이밍
요한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아시아 교회들이나 오늘날의 많은 비서구 문화권 사람들보다는 서구권 사람들에게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서구인들은 시간을 연속적이며, 뒤로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이해하고 있다. 연속적으로 째깍거리는 시계 없이 이 땅에서의 인간 실존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환상에 나오는 사건들은 줄에 꿰인 구슬들처럼 정연하게 배치되어 한 장면 다음에 또 다른 장면이 순서적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 보좌 중앙에 계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꼴라쥬(collage, 종이나 천 같은 것을 그림에 붙이는 기법)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요한이 본 이 환상이 말하는 동심원적인 이야기 양식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시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표 (time line)를 먼저 배열해 놓고 그 다음에 계시록을 풀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써 초현실주의적 뒤범벅 상태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을 우리가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 결과 계시록은 상징 속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졌노라고 고백하는 개인이나 그룹들의 사적인 영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당시 이 편지 수신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간단했다. 상황을 받아들이든지 포기하든지 둘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삶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충성을 다짐했던 분인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셔서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사악한 권력들을 굴복시켜 주실 것인지에 대해 절실하게 알고 싶어 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우리의 시계나 달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이 점을 이해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베드로후서에서도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영원 속에서, 이 땅에서의 시간은 하나님이 품고 계신 현실 속으로 모두 용해되어 버린다.
하나님께 통제권을 이양하기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는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기는 것이 기다림이라는 훈련을 의미했다.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하신 메시아가 자신들의 압제자를 물리치러 다시 오실 마지막 때를 갈망하고 있었다. 요한처럼 그들도 투옥 또는 그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실제로 버가모 교회의 한 성도는 이미 처형된 상태였는데, 로마 황제인 도미티안(Domitian)에게 바쳐진 제단에 분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계 2:1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보다는 황제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공문서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요한의 편지를 받게 될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영적 타협의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메시아의 재림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체됨으로써 동료 신자들이 품게 되는 고통스러운 의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편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는 의문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또한 선지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심지어는 예수님에게서도 제기되는 의문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나이까(막 15:34). 그
교회 지도자가 요한의 편지를 읽어 주던 때에 사람들은 지치고 낙심해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견뎌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자신들을 위해서 별로 해 주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운명을 걸기로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늘에서 경배를 드리고 있는 요한의 환상은,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공의를 구하는 그들의 간구를 금대접에 담아 쌓아 두고 계신다는(계 5:8)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 준다. 참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경배를 드릴 때조차도 그 우주적인 합창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아시아 교회들에게 쓴 편지는 수세기 동안 종말의 때를 예측하는 것으로 수없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측된 수많은 그 마지막 때는 왔다가 사라졌고, 그로 인해 암호를 해독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고난받는 자들을 격려 하고 지친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했던 목회 서신으로서의 계시록이 지닌 본래 역할이 과소평가되었다.
통제권의 이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통제하라는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용해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 파스칼(Pascal)은 우리가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시간이라는 베일을 쓰고 있는 우리가 천국을 조금이나마 감지해 보려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방 안에 또는 나무 등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워 안팎에서 들려오는 수천 가지 재잘대는 소리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점점 더 그 나라안에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고요한 침묵은 시간에 얽매인 우리 피조물들이 예배를 위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연한 보좌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천사들과 천사장들 및 모든 천군들의 찬양에 목소리 높여 합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경배는 이 땅에서의 여정을 감당해 나갈 힘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그 여정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상기시켜 준다.
심판을 기록한 책
그러나 계시록이 우리에게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 시대와 문화에 깊은 갈등을 일으키는 주제인 심판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분노의 파도를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공의의 개념은 인류 전체에 퍼져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꼬마들까지도 부모나 교사에게 형평성을 유지해 달라고 호소할 때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외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공의가 이행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보편적인 바람은 없다. 그것은 나이나 성 또는 문화와 상관없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심겨 있다.
불의나 폭력을 겪을 때, 우리는 하나님은 과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만약 우리도 숨을 죽여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시편 기자가 했던 것처럼 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언제까지니이까?하고 읊조렸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럴 때 불신자들조차도 자신들이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가운데서 요한이 돌보던 아시아의 양 떼처럼, 신앙 때문에 언젠가는 순교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재난은 대부분 개인적이며 결혼 관계의 파탄이나 실직, 실업, 치명적인 질병 또는 젊고 전도유망한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는 자녀들의 타락 같은 형태로 찾아온다. 하지만 비록 우리의 삶에 순교의 드라마나 영웅주의 같은 건 없지만 우리가 겪는 고뇌 또한 순교에 못지않게 크다.
그럼에도 요한의 환상은 최후의 해방전쟁과 악에 대한 처벌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의인들에 대한 평가로 시작하고 있다. 요한의 첫 환상에서(1:9-3:22)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나 그의 앞잡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심판하신다. 충성, 인내, 오래 참음, 사랑과 같은 그들의 자산과 함께 결점들도 보여 주고 있는 영적 보고서들이 제출된다. 일곱 교회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 각각 어떻게 대처했는지 밝혀 주는 개별적인 설명을 하나하나 듣고 있다.
그와 같은 내적 평가를 수용할 때 우리의 영성은 견고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된다. 현재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정직하게 검토해 보는 것, 잘못에 대해서는 회개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교정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우리 자신의 소홀함이나 자기기만의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치우지 않는다면 이후의 모든 조치들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가게 할 것 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풀지 않으면 안될 판단주의(judgementalism)라는 매듭이 남아 있다. 시간에 얽매인 피조물인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해도 공의를 갈망하고 있다(비록 평화를 갈구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런 태도에는 나름의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마 7:1). 따라서 우리도 남을 판단하려는 태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6-18장에 나오는 혹독한 핏빛 장면들은 우리에게 물리적 거부감을 주고 도덕적인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사실, 시편에서도 때로는 분노에 찬 복수의 요구가 찬양 속에 배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기에 수용할 수 있었던 시편에서의 분노와 복수가 계시록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계시록의 이 기괴한 중간 부분을 건너뛴 채, 장례식에서 가장 흔히 읽히는 계시록의 마지막 위로의 장으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아직도 코에는 지옥의 유황 불 냄새가 자욱한데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의 마지막 환상을 충분히 그리고 거리낌 없이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피와 심판의 장면과 열광적 예배 장면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양이다.
어린양의 승리
먼저 5장에서 그리스도는 피에 젖은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는 각 조소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위한 그분의 희생 때문에(계 5:9)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포한다. 계속되는 장들에서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자연 재앙들과 우주적 전쟁 장면들은 어린양에 대한 경배와 맞물려 있다. 그 이유는 피 묻은 어린양이 반전의 위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의 희생은 피조물 구속의 원천이 된다. 일단 우리가 천국에서 안전해지고 난 다음에는 어린양의 희생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아득한 악몽인 양 잊혀지리 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볼 때 그 희생의 행동은 영원하다. 어린양의 피는 결코 무효화될 수 없다. 세상을 위한 전투는 갈보리에서 승리하셨다.
그 승리는 우리가 어린양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갈 때 계속 보장된다. 요한은 역사의 종말 때까지 우리가 정사와 권세들과 싸워 나가면서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야 함을 결코 듣기 좋은 말로 꾸미지 않는다. 어린양은 그의 이름으로 인해 우리가 겪는 고난 및 모든 피조물의 신음에 의미를 부여한다(롬 8:22-23). 구속하시는 재판관으로서의 어린양은 심판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님을 확증해 준다. 그 일은 양과 염소를 나누기에 합당하신 분에게(마 25:31-46) 속해 있는데, 이는 그분이 그들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환상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그 싸움은 계속 승리를 거두어 왔으며, 여전히 맹렬하게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임을 알려 준다.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은 마술을 부린 듯 일순간에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에 얽매인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을 향해 열린 문틈 사이로 비취는 빛의 조명을 받고 있음을 본다. 그 빛은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의 기대를 정결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할 일은 기억하고 견디며 기대를 갖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든지 영원의 빛이 그 위에 비취게 되면 그것들은 오래 진열되어 퇴색한 가짜 상품들처럼 보인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은 더욱더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향해 다가간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반을 두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삶의 헛된 소망을 뿌리 뽑고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에(요 1:9) 우리 몸을 녹여야 한다.
- 버지니아 스템 오웬즈(Virginia Stem Owens)
요한계시록 연대기
- AD 30년 : 그리스도의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스데반의 순교
- AD 47-48년 :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 AD 50-52년 :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 AD 53-58년 :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 AD 62년 :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 AD 64년 : 네로의 박해
- AD 67년 : 바울의 순교
- AD 68년 : 베드로의 순교
- AD 70년 : 예루살렘 함락
- AD 81-96년 :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 AD 95년 : 사도 요한의 밧모 섬 유배
- AD 100년 : 사도 요한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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