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요한계시록 1-22장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초대교회 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 공동체가 신앙과 삶에 대한 수많은 쟁점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이 온 인류를 포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지키시며, 궁극적으로 그들을 영원에 이르게 하는 모든 과정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목차
계시록을 통해 보여 주신 미래의 비전
계시록에서 우리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어 인간의 실존이 영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게 된다. 계시록은 창세기 1-11장의 역사를 통해 드리워진,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더 큰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던 커튼을 걷어내 주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시작하신 세상의 혁명을 경험했던 1세대 제자들의 관점을 통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성품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마28:20)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늘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계시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실재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완성의 경지에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
창세기와 계시록은 성경의 각각 처음과 끝에 위치한다. 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 하는 대로 시간의 처음과 끝에 위치하여 인간을 인류 역사로부터 벗어난 위치에 놓는다. 특정한 민족에 국한된 유대교로부터 벗어나려는 교회의 모습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서신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계시록이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던 때에는 이미 유대교와 기독교가 완전히 분리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은 모든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라는(계 11:9) 구절과 이에서 약간 변형된 표현(예를 들어, 13:7)들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포괄적 공동체, 곧 모든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했던 공동체에로의 부름(calling)이다.
계시록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로(1:5) 그리고 만물의 시작과 끝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이 제시하시고 있는 미래는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세상의 무대에 선 에클레시아 (ekklesia),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장래에 대한 비전이다(1:9-3:22). 세상 끝날까지 (마 28:20) 전 세계 교회를 향해 전파해야 할 그리스도의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진 서신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계 1:4). 아마도 하나님이 제시해 주시는 교회의 전형적인 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몸과 인생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비전이다. 비록 교회가 이상적으로는 인종 구분이나 편협한 율법주의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근거한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동체이지만,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가운데 승리하는 삶 이면에는 고군분투하며 유혹과 실패에 넘어지고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는 현실이 있다. 바벨론의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이 주변 지역으로 흩어져야 했던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것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종착지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이 계획할 수 있는 마지막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뿐 아니라 축적된 문화와 문명 그리고 전통과 교회 제도를 통하여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세상에 찾아올 엄청난 격변과 재난이 예언되고 있다. 선과 악을 대표하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며 인간의 악한 본성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4:1-20:15). 선과 악의 세력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고 이때 하나님에 의한 공개적인 심판이 모든 인간에게 임하게 된다. 이 땅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박해와 순교가 세상에 만연해 극심한 고난을 겪게 되지만, 예수님을 향한 신실함과 충성이 반드시 회복될 날이 오리라는 확신 가운데 그 모든 고난을 견뎌 낸다.
마지막 때에는 땅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황폐화되어 지질학적, 생물학적인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결국 재림을 앞둔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 이 땅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곳이 된다. 성경에서 바벨론 이라고 지칭 하는 인생에 대한 인본주의적 체계는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18:1; 19:3). 하나님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는 심판주로 오시지만 그분의 백성에게는 끝까지 함께하시고 그들을 붙들어 주시는 구원주로 오신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친히 인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우주적 통치자로서 이 땅에 오시게 된다. 역사상 끊이지 않았던 선과 악의 오랜 싸움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예수님의 승리로 돌아가며 그분의 임재가 온 세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이 변화의 마지막 장면은 심판이 될 것이다. 사탄과 그 하수인들이 먼저 나아오고 그 다음에는 모든 인간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20:1-12) 심판대 앞으로 나아온다. 각자의 인생에 대한 심판이 행해지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이루어진다. 악한 사탄은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영원히 그 힘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한 나라와 완전한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21:1-22:21). 바벨론 포로기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렘 31:33-34) 예언한 바로 그때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마치 사람의 뜻대로 조종되는 로봇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개조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던지 아니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이미 인간의 개조를 감행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방법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라는 구절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 영원한 세계에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에까지 성숙한 상태이므로 더 이상의 성장과 성숙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죄를 알지 못했던 순결이 아니라 죄악이 무엇인지 아는 완전한 순결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 동일한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죄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좋게 보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창 3:6),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감당하는 모든 사역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은 성취되었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다스리게 될 것이다(계 22:5).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영원한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절정이다. 그곳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 이시기 때문이다(계 21:22), 종교적인 일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그 결과가 하나님 나라에 필수적이고 영원한 요소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가운데 깊이 새겨진 문장(紋章, emblazoned)과도 같은 것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다. 중보자이신 어린양은 우리 존재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영원히 대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영원한 실재는 우리의 성품에 안정감을 주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경건의 모습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사역 속에 우리는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제자도를 상실한 오늘의 문화
수많은 사람들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제자들이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교(異敎)적인 세상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자신을 온전히 드려 희생함으로써 당시 지중해 문화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수세기 동안 이러한 문화는 발전과 확장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 방향성이 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널리 알려져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는 것이 영성 개발에 있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은 예수님의 제자도를 목적으로 삼고 끊임없이 진보하며 포괄적인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탁월한 예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서방 세계에서 매일 접하는 것들은 예수님의 제자도를 상실한 기독교 문화다. 더욱이 미래 사회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21세기와 그 이후에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과연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모른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은 받았지만 그분의 제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삶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현대 사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계시록 4-20장에 나타난 시대에서는 미지근한 기독교인들이 틀림없이 제거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과 순교의 핍박이 닥쳐오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신실한 제자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그날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올려지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그 영광스러운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3-4). 죄악과 절망은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며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끊임없는 진보를 통해 완성 될 것이다(21-22장).
말씀과 성령의 권능 그리고 변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과 성령이 주관하시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유익한 변화를 위한 유일한 과정이다. 이 변화는 지금까지 경험되어 왔고 지금도 경험되고 있는 다른 어떤 변화 체험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이 변화를 통해 권능과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셨던 방식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오심으로써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및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 가운데 역동적으로 결합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이다(시 85:10).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문제들을 변화시키신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반역과 소외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땅에 교회가 사라진 후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재능과 창의력과 책임감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시인과 예술가들과 선지자들이 희미하게 꿈꿔 오던 복받은 인생 의 모습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의 영성 개발의 한계
계시록은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양식에는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세상의 죄가 우리의 한계였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세력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훼방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이 땅에서의 영성 개발의 한계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났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일시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나라들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내가 속한 국가의 정부와 재정, 교육과 예술과 문화 등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사상과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따르는 데 가장 치명적인 원수들인데, 이것들은 종종 교회 안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교단주의나 분파주의에서 비롯된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우월감이 바로 그것이다. 권위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시대의 지성적, 사회적 우상을 섬기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외면적으로 복음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직하지도 실제적이지도 않다. 더욱이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별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또 하나의 한계는 육신을 입은, 그래서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할 때는 개인이든 사회든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요술봉을 흔드셔서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지 않으시고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일하신다. 결국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대가를 지불하고 오랜 시간을 거쳐 얻은 선택과 경험을 쌓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완전히 거할 그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 제자도의 길을 통하여 믿음에서 더 큰 믿음으로, 은혜에서 더 큰 은혜로 나아가게 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결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악의 실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고난이나 실패가 없는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모든 시련으로부터 건져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적절한 영적 훈련을 통해 말씀과 성령 가운데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아무리 깊은 곳까지 나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단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적인 영감을 받았다 해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세상의 잘못된 것을 모두 바로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완전해지는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은 태초에 시간을 시작하실 때부터 의도하셨던 대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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