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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내 마음대로 공부하기

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하였을까

by OTFreak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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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요구에 무릎 꿇고 결국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한 인물이 빌라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한 인물로 우리의 인식 속에 박혀 있습니다.

   '히스토리 채널' 홈페이지의 'CHRISTOPHER KLEIN'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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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서술은 그를 매우 오만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에게 더욱 쉽게 접근하여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본디오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께 "진실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또한 빌라도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유대 지역의 로마 총독이 처음에는 예수님께 무죄를 선고하였다가 군중들의 반발로 인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히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흔들리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성경적인 자료에서는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전통을 무시하며 야만적으로 유대인들을 통치한 재판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내용이 진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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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어린 시절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빌라도가 주후 26년부터 36년 사이에 유대 지역의 로마 총독으로 통치하기 전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기사(equestrian)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추측되지만, 일부 전설들에 의하면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빌라도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내용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인 필로(Philo)가 전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후 50년 경에 기록된 필로의 글에서는, 빌라도가 "뇌물, 모욕, 강조, 분노, 욕망, 재판 없는 처형 등을 계속해서 반복하였으며 멈추지 않고 매우 잔인하게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무자비하게 다스렸다"라고 혹평하였습니다.

   "필로는 빌라도의 통치는 부패와 뇌물로 가득 차 있었던 통치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Willamette 대학의 초기 기독교 역사 전문가이자 "잊혀진 신조"(The Forgotten Creed)를 포함한 여러 책들을 저술한 스티븐 J. 패터슨(Stephen J. Patterson)이 말합니다. 잊혀진 신조는 편협함과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등에 맞선 기독교의 근원적인 투쟁에 대한 책입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부정과 부패로 통치하였지만, 빌라도는 대부분의 통치자들보다도 훨씬 더 무자비하게 통치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에딘버그 대학의 신학대학원장(the University of Edinburgh's School of Divinity)이자 "역사와 해석 속의 본디오 빌라도"의 저자인 헬렌 본드(Helen Bond)에 의하면, 필로가 기록한 내용들이 과연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습니다. "필로는 매우 극적인 작가이다"라고 그녀가 언급함으로써, 필로는 매우 편협한 작가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녀는 필로가 "유대인 율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록하였지만, 유대인 율법을 반대하는 자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라고 평가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를 보건대, 필로는 그를 "매우 가혹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과 의견 충돌을 보였다.

   필로는 또한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관습을 어기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새긴 금으로 된 방패 한 쌍을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옛 궁전에 두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썼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활동했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빌라도가 예루살렘 안으로 로마 황제의 모습을 담고 있는 군사 깃발들을 로마 군대가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예루살렘 안에는 어떤 형상도 세우거나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군중들은 유대 지역의 통치수도였던 가이사랴에 항의 차원으로 방문을 하였으며, 그들은 가이사랴에 있었던 빌라도의  궁전에서 5일 동안 엎드려 있다가 빌라도가 마침내 군중들의 요구에 응할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요세푸스는 빌라도가 공직에서 떠난 해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매우 정확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본드는 말합니다. "요세푸스가 앞서 말한 그 이야기는 새로 부임한 총독이 통치 지역의 군중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주며 아울러 지역 의견의 힘을 완전히 무시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와 동시에, 본드는 이 이야기가 대중의 의견을 지지하고 존중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더 피비린내 나는 결말과 함께 또다른 사건에서, 빌라도는 예루살렘을 향한 수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성전 금고의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였다고 요세푸스는 말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시위대가 몰려들자, 빌라도는 사복을 입은 군인들을 군중 속에 침투 시켰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신호에 따라, 사복 군인들은 옷 속에 감춰 두었던 곤봉으로 많은 시위자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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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디온에서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었다

 

복음서에서는 우유부단한 빌라도로 나타난다.

   요세푸스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에 동의하는 빌라도의 악명이 높은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제사장들과 평신도 장로들의 최고 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 기간 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위협으로 느끼며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으며, 신성모욕죄로 그를 재판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주장하였다며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빌라도를 압박하여,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인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필로와 요세푸스가 묘사한 무자비한 통치자로서의 빌라도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사복음서에서는 모두 빌라도가 매우 우유부단한 재판관으로 교사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는 군중들의 욕망에 굴복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선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패터슨은 주후 66년에서 70년 사이에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였던 유대인 반란이 실패한 상황 가운데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마가가 복음서를 썼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기독교 종파가 이 당시에 유대교와 심한 단절의 과정을 겪고 있었던 까닭에 로마인 개종자들을 교회 안으로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 로마인 총독인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무죄를 선고하려던 사람으로 묘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목적은 사실 역사적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패터슨은 말합니다. "특별한 시각으로 유대 전쟁을 바라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마가는 유대인들의 반란의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둔 유대인 통치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그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마가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기보다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손을 씻은 후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죄가 없다. 너희들이 직접 책임을 져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호응하며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유대인들은 수 천년 동안 보복을 당해 왔습니다.

   "마태는 로마인들이 사실은 예수를 사형에 처혔지만 유대인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이후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련의 논쟁입니다"라고 본드는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유월절과 같이 군중들이 모이는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셨다면, 그 도시가 이미 인구들로 터져 나갈 정도였을 때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와 관련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총독의 권한이었고, 여러 증거를 들은 후에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최선의 행동 방침임을 의심할 여지가없습니다.

   신약성경의 이야기의 또다른 요소는 여전히 역사적인 증거로 의해 입증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유월절 행사의 전통에 따라 민중 투표에 의해서 범죄자의 사형 선고를 내리려는 빌라도의 제안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에 범죄자인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패터슨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관습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는 전혀 없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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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가이사랴에서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빌라도는 그의 유대 지역 통치 이후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요세푸스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따르면, 빌라도는 사마리아 지역의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강제로 진압한 이후에 공직에서 물러났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로마로 돌아간 이후, 빌라도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일부의 전승들에 따르면, 빌라도는 칼리굴라(Caligula) 황제에 의해 처형 당하고 그의 시체는 티베르 강(Tiber River)에 던져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초기 기독교 작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빌라도가 마지막에는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되어 황제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61년, 지중해변의 가이사랴 유적지에서 고고학자들은 빌라도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였습니다. 빌라도의 이름과 관직이 라틴어로 새겨진 돌 조각이 고대 극장의 계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빌라도 이름이 새겨진 돌"이 다른 건축물의 헌정 돌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8년 11월 이스라엘의 탐사 저널에서 더 발달된 사진술을 사용하여 베들레헴의 헤로디움에서 발굴된 2천년 된 구리 합금 고리에 헬라어로 새겨진 빌라도의 이름을 찾아 내면서 그의 역사적 존재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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