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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02 출애굽기 주석및해설

연합된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출애굽기의 역사적인 배경

by OTFreak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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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그 날에, 가장 강한 나라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극적이고도 감동적인 사건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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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1500년-1200년

   구약 성경의 두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족장 시대는 민족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대가족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였습니다. 야곱 시대에 있었던 대기근으로 인하여 중동 전역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지닌 바로가 다스리는 왕조가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되었을 때, 이 '외국인'들은 억압 당하고 강제 노동에 처해졌습니다.

   모세의 지도 하에, 이 노예들의 큰 무리가 탈출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시내 산에서의 위대한 언약식과 함께 광야에서 방황하던 40여년 동안의 그들의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뚜렷한 종교적인 실체를 깨닫게 하였으며 그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이 이스라엘 국가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가나안 정복 사건과 문화적, 종교적인 유혹 앞에서 가나안 족속들과의 구별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계속된 투쟁들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독특한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

 

고고학과 과거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들은, 청동기 후기(주전 1500년-1200년)에 발견된 것들입니다. 아마르나 문서는 아케나텐(주전 1352년-1336년)으로도 알려진 아멘호텝 4세의 왕실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아케나텐은 외교 정책보다는 종교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양신인 아텐을 숭배하였으며, 이 신앙에 기반하여 유일신 사상을 도입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에서의 활발한 정복과 통치 활동을 포기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과 애굽 제국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아케나텐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혼란과 내전이 이어졌고, 아마르나 문서에는 이와 같은 혼란과 무질서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 군대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안정적인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 국가의 왕들은 이웃 나라들을 침공하며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이 과정 중에, 하비루(Habiru)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습격도 있었습니다. 아마르나의 많은 문서들에는, 이러한 하비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다른 글들에서는, 애굽의 화려한 권력의 시대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주전 1213년부터 1203년까지 애굽을 통치하였던 메르넵타의 석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첫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르넵타는 리비아와 다른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며 석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석비의 내용들 가운데 "이스라엘은 버려져 있지만, 그 씨앗은 그렇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과 집단들

   이 시기의 초기에는, 애굽의 군대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쳐서 시리아까지 진군하면서 현재의 이라크 지역인 미타니(Mitanni) 제국의 후리안(Hurrians)인들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후리아인들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앗수르를 통치하고 살만에셀 1세(주전 1273년-1244년)까지 지속된 미타니 제국을 유지한 것입니다. 앗수르 지역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문화적으로 더욱 주목 받게 되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애굽인들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인들 사이에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었습니다. 히트이트 제국은 이집트의 영향 하에 있었던 우가릿과 아무루와 같은 도시 국가들과 지역들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조되던 애굽과의 적대감은 결국 애굽 왕 바로 람세스 2세(주전 1279년-1213년)의 통치 기간에 전쟁으로 발발하였습니다. 시리아에서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었고, 팔레스타인은 애굽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히타이트 제국은 주전 1200년 경에 멸망하였는데, 멸망의 원인들 중에는 에게 해에서 건너 온 "해양민족"의 공격과 앗수르의 부흥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후기 청동기 동안에 지속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는 미디안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전통적이거나 정치적인 두 그룹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아카바 만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양을 치는 목동들이 대부분이었고 구리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이나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 갔었고, 그 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브올(Peor)의 바알을 경배한 사건은 미디안 족속과 관련이 있습니다(민 25:16-18).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던 시대에는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민 31:1-8).

   가나안 사람들의 경우, 이들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감행하던 당시에 요단 강 서쪽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멘호텝 2세(주전 1427-1400)의 비문에 처음 언급이 되었으며, 아마르나 문서에서도언급되었습니다. 원래, "가나안 사람"(Canaanites)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후리아인들의 군대의 귀족이나 상인 계급에 사용된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인"이ㅏ는 용어는, 대부분 요단강 서쪽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다른 때에는 이 용어가 해안을 따라 살았던 페니키아인들만을 지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 문학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던 중에 이미 통일된 민족으로 부상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의 주제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들의 초점은, 하나님의 활동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반응을 향해 있습니다. 이 내용들로써 청동기 시대 후기의 더 큰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지도 아래에서 애굽에서 탈출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위대한 언약을 맺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을 넘어선 더 많은 거룩한 가르침과 관련된 언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경험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사건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광야에서의 방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새로운 지도자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갔는데, 이 내용들이 바로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내용들입니다.

 

애굽과 출애굽

   결국 애굽 왕조는 증오하던 힉소스 통치자들을 추방하고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시대(주전 1550년-1069년)의 마지막 번영의 시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아마도, 모든 외국인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 넣어 복수하고자 욕망이 이 시대의 바로들에게는 더욱 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투트모세 3세(주전 1479년-1425년)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시리아에서의 이러한 이득은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제국의 도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투트모세의 후손들 중에 한 사람인 아멘호텝 4세(주전 1352년-1336년)는 특히 주목할 만한 애굽 신왕국의 통치자였습니다. 애굽의 전통 종교에서 강조하던 많은 신들을 거부하고, 그는 아텐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양신만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꾸고 아마르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게 됩니다. 아마르나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많은 편지들과 문서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국가들이 아케나텐의 통치 기간 동안에 많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그의 종교적인 개혁은 그가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됩니다.

   또다른 신왕조의 통치자인 람세스 2세(주전1279년-1213년)는 많은 건축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애굽의 문헌들과 자료들에 의하면, 람세스 2세는 이전의 힉소스 족속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를 확장시켜서 자신의 이름을 딴 "람세스"라고 명칭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19 왕조와 20 왕조의 왕궁이 세워지는 곳이 되었습니다. 람세스 2세는 60년 이상을 통치하였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람세스 2세의 통치 시대보다 더 약한 애굽을 물려 받았으며, 그의 영광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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