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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42 누가복음 주석및해설

누가복음 19장 11절-27절 열 므나 비유, 성경 배경 주석 정리

by OTFreak 202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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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 11-27, 열 므나 비유

 

   누가의 종들에게 돈을 맡기는 주인에 관한 비유를 언급하는 형식이 마태복음과 유사합니다. 누가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동일한 구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받았다거나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겼다는 추가적인 언급도 합니다( 4:24-25 참조).

   하지만 세부 사항에는 몇 가지의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 비유들이 선포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비유는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으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24-25).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여리고와 예루살렘의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아직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으셨고, 종말론적인 말씀을 전하시지도 않으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이 비유의 내용들을 잘 이해한 상태에서 본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주인(마태복음)이나 귀인(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이익을 남기는 하인(혹은 종)은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되고, 돈을 단순히 숨겨 두었던 종은 벌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주어지는 교훈은, 풍성하게 남긴 종은 더 많이 받게 되지만 남기지 않은 종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2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성실한 종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이 비유의 해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 방법을 제시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들은 과연 이 귀인을 높이 평가했을까요? 그들도 귀인을 위해 수고하여 큰 이익을 남긴 종을 칭찬하고 단순히 돈을 숨겨 두었던 하인을 비난했을까요?

   우리가 당시의 농민들의 농경생활에 대해 고려해 본다면, 이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만을 고집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귀인에 대해서 좋은 말만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종들이 남긴 이익들이 과연 종들에게는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다른 내용의 비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한 귀인은 먼 나라에 가서 왕위를 받은 후에 돌아왔습니다(12). 이 본문에서의 귀인이란, 역사적으로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였을 것입니다. 주전 4년 경, 그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죽었을 때, 그는 로마로 사신을 보내어 유다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헤롯 대왕의 여러 가신들이 아켈라오의 통치에 반대하였으며 황제에게 반대하는 청원서를 보내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아켈라오는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을 학살하였고, 결국 헤롯 대왕이 통치한 유다 왕국의 절반만 받게 됩니다. 절반의 통치권을 받고 돌아온 아켈라오는 공물을 위하여 백성들을 착취하였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켈라오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귀인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나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이 비유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면, 왜 하필 유다 백성들이 싫어하는 아켈라오의 사실을 가지고 말씀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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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 귀인은 자기 종 열 명을 불러서 열 개의 므나를 주었습니다(13). 열 명의 하인들은 각각 하나의 므나를 받았습니다(마태복음에는 세 명의 종이 서로 다른 금액을 받습니다). 므나라는 단어는 셈어에서 가지고 온 단위로, 1 므나는 약 100 드라크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 달란트의 60분의 1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 명의 종들이 5 달란트, 2 달란트 그리고 1 달란트를 받았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누가복음에서는 각각의 종들이 동일하게 1 므나씩 받았다는 것은 이 비유가 더 원래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3절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고 말한 것은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πραγματεύομαι)인데, 히브리어에서는 대출과 관련된 단어로 나타납니다.

   22절의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라는 말은,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주인의 말과 유사합니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었고, 귀인은 자신이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대신 두지 않은 것을 취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 마태복음의 비유에 나온 주인과 같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귀인 역시 은행에 자신의 돈을 두면 이자를 받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자를 얻는 것에 대한 기대는 사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에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23:19-20; 22:25; 25:36-37).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이자를 이방인에게 받는 것은 허용하고 있지만, 동족인 유대인끼리는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이 이 장면에 등장한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 누가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귀인은 탐욕스럽고 복수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볼 때에는 그는 사기꾼과 같고 도둑과 같으며 유대 율법의 인간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무자비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귀인이든 마태복음의 주인이든, 이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기독교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해서,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듣던 청중들은 대부분이 농민들이었을 것이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귀인에 대해여 두려움을 가지고 혐오의 시각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귀인의 착취적인 행동은 농민들의 이자를 갈취하며 적들에게 무자비함으로 인하여 큰 두려움과 경제적인 부담을 농민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비유에 전제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요소, 그리고 역사적인 요소를 고려한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헤롯 왕조의 전형적인 잘못된 왕의 자질과 통치 이념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계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들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통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젠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열 두 왕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19:28, 22:28-30).

   교회의 역사의 후대에 와서, 이와 같이 종에게 돈을 나눠 주는 비유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되었습니다. 본래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맥락과는 완전히 분리가 되고 헤롯 아켈라오에 대한 역사적인 기억은 사라짐으로써, 이 비유는 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더 많은 통찰력과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되는 반면, 영적으로 둔한 사람은 더 적은 기회를 받거나 기회마저 박탈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Evans, C. A. (2003). The Bible Knowledge Background Commentary: Matthew–Luke. (C. A. Evans & C. A. Bubeck, Eds.) (First Edition, pp. 465–467). Colorado Springs, CO: David C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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