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에스라 9장 9절-15절 속에 담긴 '아무도 감히 서지 못하리이다'라는 절망의 상황이 어떻게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일까요? 반복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를 향한 십자가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스라 9장 9절-15절, '남은 자의 절망'과 '남겨진 은혜'
서론
오늘 우리는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선 한 지도자의 기도를 통해, 폴 스캇 윌슨의 4페이지 설교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에스라 9장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또다시 끔찍한 죄에 빠진 현실을 고발합니다.
설교는 문제(율법)에서 시작하여 은혜(복음)로 나아가야 합니다. 윌슨의 방식대로, 우리는 본문 안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우리 세상의 문제로, 그리고 본문 안의 은혜를 거쳐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갈 것입니다.
본문 속의 문제
먼저, 9절을 보십시오.
에스라 9: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에스라 9장의 비극은 충격적입니다. 에스라가 도착하기 전,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가나안 족속과의 이방 결혼을 통해 자신들을 더럽혔습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그들이 70년간 포로로 잡혀갔던 이유가 바로 이것, 즉 우상숭배와 이방 풍습과의 타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서 막 풀려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사...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셨습니다 (9절). 기적적으로 "적은 무리" (a remnant)를 남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던 바로 그 죄악을 다시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변명이 없습니다. 그는 10절에서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저버렸나이다"라고 외칩니다. 본문의 문제는 "은혜를 잊어버린 백성의 반복되는 죄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울타리)를 걷어차고 다시금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 앞에서 어떠한 희망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는 15절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 서 있나이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아무도 주 앞에 감히 서지 못하리이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죄를 직시하게 하는 것. 본문은 절망으로 끝납니다.
세상 속의 문제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은혜를 너무 쉽게 잊지 않습니까?"
우리는 에스라 시대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남은 자'들입니다. 질병에서 회복되고,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작은 부흥'(9절)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빨리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까?
우리는 본문의 이방 결혼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영적인 타협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울타리"(12절)가 답답하다고 느낍니다.
- 세상의 성공 논리와 타협하며 주일을 포기합니다.
- 세상의 쾌락과 타협하며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며 '적당히' 믿는 것을 지혜라 부릅니다.
우리는 13절의 고백처럼, 우리가 지은 죄악보다 "경하게 벌하셨음"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벼워진 징계마저 불평하며, 다시 14절의 죄악으로 돌아갑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 윌슨의 지적처럼, 사람이 설교의 중심이 되면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에스라처럼 15절의 고백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악 때문에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본문 속의 은혜
하지만, 에스라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9절 속에서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스라 9: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에스라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외칩니다. 본문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라는 지금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에스라의 절망적인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라가 고백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9절) 비록 노예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의 핵심입니다. 그들의 상태(노예)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9절)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에게 성전을 재건할 '새 생명'(reviving)을 주셨습니다.
-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13절)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대로라면 전부 멸망해야 마땅하지만, "경하게 벌하시고" 일부를 남겨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은혜는 "자격 없는 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신실하심"입니다. 에스라가 기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절망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Our God)이라고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9절, 10절, 13절).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절망 속에서 붙잡는 유일한 은혜의 빛줄기입니다.
세상 속의 은혜: 십자가,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를 서게 하는 능력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의 은혜를 오늘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에스라는 15절에서 "아무도 주 앞에 감히 서지 못하리이다"라는 율법의 정죄로 기도를 마칩니다. 그는 "남은 자"가 어떻게 구원받을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에스라가 보았던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보다 경하게 벌하시는"(13절) 자비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백성인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 전부를 다른 곳에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에스라의 고백("아무도 감히 서지 못하리이다")은 사실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 우리가 감히 설 수 없었던 그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서셨습니다.
- 우리가 받아야 했던 그 진노를, 예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 우리가 반복해서 무너뜨렸던 그 '울타리'를, 예수께서 자신의 몸으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남은 자"는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죄를 지었고,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자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부름 받은 오늘 '세상의 남은 자'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회개나 결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또 넘어져도,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노예 되었을 때에도 버리지 아니하신" 그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아들의 공로 때문에 지금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9장 15절의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영원한 희망으로 바뀝니다. "아무도 감히 서지 못한다"는 율법의 선언 앞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복음의 선포가 울려 퍼집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죄악 가운데서도 감히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 부르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할 기도
- 받은 은혜를 잊고 타협하는 죄를 회개하게 하소서.
- 죄악 속에서도 버리지 않으신 은혜에 감사하게 하소서.
- 우리의 의가 아닌 십자가만 의지하며 서게 하소서.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 새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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