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성전 정결과 예배 회복(대하 29:20-36)을 통해 죄의 해결이 참된 기쁨과 헌신의 시작임을 밝힙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가리키며, 그 은혜 안에서만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회복될 수 있음을 묵상하고 설교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이 설교는 지친 신자와 회의적인 탐구자 모두에게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9장 20절-36절, 속죄가 시작될 때, 찬양이 시작됩니다
서론: 문 닫힌 우리 마음의 성전
현대 도시의 중심부에 수십 년간 굳게 닫힌 채 버려진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한때는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많은 이들이 위로를 얻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거미줄과 먼지만 가득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내면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문이 닫히고,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멈춘 채, 세속적인 염려와 냉소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성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역대하 29장의 히스기야 왕은 바로 그런 영적 폐허를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성전 문을 닫아버리고 온갖 우상을 들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시켰습니다. 국가는 영적으로 파산 상태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엇부터 시작했을까요? 그는 단순히 성전을 청소하고 문을 여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의 가장 깊은 근원, 즉 죄의 문제부터 다루었습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명확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참된 기쁨과 예배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속죄의 은혜 위에서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첫째, 죄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하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 문을 다시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수많은 동물을 성전으로 끌고 왔습니다. 21절을 보면 수송아지 일곱 마리, 숫양 일곱 마리, 어린양 일곱 마리, 그리고 숫염소 일곱 마리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나라와 성소와 유다 전체를 위한 속죄제물이었습니다.
속죄제(sin offering)는 현대인에게 매우 낯설고 불편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잘못을 ‘실수’나 ‘약점’으로 표현하며 그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자, 그 결과로 죽음을 불러오는 치명적인 빚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23절)는 백성의 모든 죄와 허물이 그 제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은 피를 흘려 죽습니다. 이것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히스기야는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긍정적인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이 백성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피의 제사를 통해 정직하게 고백하고 직면했던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엄중한 요구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그 대가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은 우리의 선함이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의 현실 앞에 철저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둘째, 속죄 위에 터져 나오는 찬양
끔찍하고 비극적인 속죄제가 끝난 후, 성전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27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순서를 보여줍니다. “번제를 제단 위에 드릴 때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속죄제물이 피를 흘려 죄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제야 찬양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노래는 속죄를 위한 전주곡이 아니라, 속죄의 결과였습니다.
죄의 장벽이 허물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곳에서부터 진짜 기쁨이 폭발한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 시대에 정해진 규례에 따라 수금과 비파와 제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온 회중이 엎드려 경배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만들어 낸 감정이 아닙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감격에서 터져 나온 자발적인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무언가를 행하고, 노력하고, 고행함으로써 신에게 도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셨다고 선포합니다. 구약의 수많은 동물 제사는 불완전한 그림자였습니다. 그것들은 동물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단 한 번의 영원한 속죄제사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히 10:4).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고,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은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 받아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라는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속죄가 이루어진 곳에서 비로소 참된 찬양이 시작됩니다.
셋째, 기쁨에서 흘러나오는 헌신
속죄와 찬양의 감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31절에서 히스기야는 이제 백성들을 초청합니다. “이제 너희가 몸을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으로 가져오라” 이 초청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원하는 자는” 모두 번제물을 가져왔고, 그 수가 너무 많아 제사장들의 손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들보다 “성결하게 하기에 더욱 성심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도와야만 했습니다(34절).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만들어내는 삶의 변화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거운 짐, 즉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헌신은 의무나 강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원하는” 자들의 자발적이고 기쁨에 찬 반응이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시간, 재능, 물질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기에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이것은 율법의 요구를 넘어선 사랑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지못해 드리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압도적인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마음의 헌신입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은 무거운 의무감에 짓눌려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의 헌신입니까?
결론: 갑자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주 인상적인 구절로 끝납니다. 36절입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음이더라.” 영적 암흑기 속에서 이 거대한 부흥과 예배의 회복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마음의 성전을 조금씩 고치고 개선하려 평생을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지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유일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됩니다. 닫혔던 성전 문이 활짝 열리고, 멈췄던 찬양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이 초대는 지친 신자들과 회의적인 탐구자들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속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곳에서 당신의 찬양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도
- 우리의 죄를 직면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게 하소서.
-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주소서.
- 주님의 은혜에 자발적인 헌신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추천 찬송가
- 252장 - 나의 죄를 씻기는
- 149장 -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64장 - 기뻐하며 경배하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