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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에스더 내용요약 설교자료 주석

by OTFreak 202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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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에스더서 내용 요약 및 설교자료, 주석

목차

    17. 에스더 내용 요약 설교자료 주석

     

    1. 들어가며

       에스더서에는 미묘한 복잡함과 통찰력이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직설적이고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밀히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욱더 매력적입니다. 에스더서는 말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 놓고, 또 답한 것 이상으로 많은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2. 본문

    (1) 에스더서의 이상한 점

       에스더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경의 다른 책과 다른 이상한 책입니다. 한 예로 에스더가 말하는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바사 안에 있던 유다인의 이산(離散, diaspora)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사가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많은 유다인들이 유다 땅으로 재정착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유배지에 남아 그곳을 자신들의 생활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성경 가운데 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에스더서가 유일합니다. 에스더가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잊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고대 유다인들의 삶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은 창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에스더서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질투심이 많은 왕, 무고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조직 적인 움직임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왕비'라는 불가능한 자리에 올라선 한 젊은 여인이 이 모든 역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의 적이다'와 같은 정치적인 구호가 성차별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국가주의자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에스더의 세계는 아무것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 우연과 불안의 세계입니다. 이 에스더의 세계에서 끊임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2) 베일에 가려져서 임재하시다

       에스더의 세계는 모호함의 세계, 특히 신학적으로도 모호한 세계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로 된 에스더서는 하나님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이 이야기의 70인역과는 대조가 됩니다). 하 나님은 유다 백성을 위해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무도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재는 우연, 곧 화자(話者, narrator)가 그 역할을 소홀히 하여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진술 방식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 사무엘상의 사울 이야기,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 등을 포함한 성경의 다른 많은 기사들과의 대화 속에 참여시킵니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하나님은 매우 자주 등장하실 뿐 아니라 활동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에스더서와 이들 다른 성경들 사이의 관계를 볼 때, 에스더서에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무척이나 특이한 점입니다. 다른 성경의 이야기들과 대화를 유지하면서 하나님 이야기(God talk)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관성 있고 일치된 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런 특이한 부재에서 어떤 것을 유추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신적인 심판의 징조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랍비 전통에서 에스더의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숨다 (사타르, Satar)의 1인칭으로 읽을 수 있기에, 에스더의 이름을 “나는 숨을 것이다”(I will hide)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여기기도 합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요? 탈무드는 그 해답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에게 .... 내 얼굴을 숨겨”라고 선포하시는 신명기 31:17에서 찾습니다. 물론 이 해답이 위안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에 대한 벌로써 하나님이 이 이야기의 유다인들로부터 숨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어 버림에 대한 랍비식의 이런 해석에는 분명한 확신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에스더 당대에, 베일에 가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분명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언급이라고 봅니다.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야기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행간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분명한 주장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침묵은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관해 놀라운 점은 이 질문에 대해 아주 많은 대답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우리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비록 행간에서 그리고 인간의 동기와 행동의 이면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을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를 신적인 간섭을 의지하지 않고 우연, 행운, 불운 그리고 인간적 재간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에스더서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이 이상한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에스더서가 모든 가능한 대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3) 불확실함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확실함

       영적 개발에 필요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우리에게 여기서 주어지는 도전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갖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때로는 암흑과 불확실함이 영혼의 성장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 가운데서 욥기, 전도서와 더불어 에스더서는 우리의 삶에 지닌 실제적인 질문들을 받아들이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책으로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와 전도서처럼 에스더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너무 성급히 해결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그것들을 품고 지낼 때 우리의 영적 삶이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믿음 안에서 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영성 개발은 대답들의 창고 뒤에서 안위를 찾는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영성 개발은 신비와 모호함으로 어우러진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안전하고 보장된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4)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누릴 기쁨과 웃음이 있다.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신학적 모호함과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즐기고 기뻐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또한 유다인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에스더는 메길라(Megillah), 즉 '두루마리' (the scroll)로 불립니다. 직접 관련된 명절로는 '제비들 (lots)이라는 뜻을 가진 부림절(Purim)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에스더 3 장에서 왕과 하만이 뽑은, 운명을 결정하는 제비뽑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부림절은 유다 절기에서 가장 열광적이고 쾌활하며 파괴적인 절기입니다. 부림절만큼은 지켜야 할 법들과 권위 있는 조직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부림절에 가장 중심적이고 인기 있는 부분은 에스더 두루마리를 공개적으로 요란하게 읽는 시간입니다.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에스더를 듣기 위해 저녁에 한자리에 모입니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스더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에스더, 와스디, 모르드개, 하만, 내시)처럼 옷을 입거나 좀 더 이국적인 모습(외계인, 영화배우, 타락한 정치 지도자)의 복장을 하고 나옵니다. 

       어떤 경우이든 청중의 참여는 필수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부림절 연극 이야기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요란하게 소리를 냅니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환호성을 보내고 하만을 야유하고 왕을 조롱합니다.

       부림절은 에스더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연하는 공동체적인 축제입니다. 그것은 이 고대 본문의 멋지고 기막힌 낯설음과 고민스러운 익숙함 모두를 인정하는데 매우 적절한 방식입니다.

       익숙한 것이 낯선 것이 되고, 낯선 것이 익숙한 것이 되어 ‘우리'와 '그들 간의 구별이 흐려지는 시간입니다. 이때에는 사회 위계 구조의 규칙들이 갖고 있는 힘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에스더 이야기가 보여 주듯이 이 열광적인 축제의 날은 역사상 수차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날에 유다인들은 적들의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셀 수 없는 학살, 수도 없이 시도된 종족 말살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에 3:13)라는 대학살(홀로코스트)은 부림절 축제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작가이자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비젤(Eli Wiesel)은 축제와 끔직한 공포가 섞여 있는 이 이야기의 기묘한 혼합을 그의 연극 '하나님의 시험'에서 잘 그려냈습니다. 이 연극의 배경은 한 작은 마을의 부림절 전날 밤으로, 마을의 유다인 주민들은 하루 전날 밤 조직적 학살을 통해 모두 멸절되었습니다. 연극에서 시인 아브레멜(Avrémel)은 “부림절의 기적 없는 부림절을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읊습니다.

       기적 없는 많은 부림절에 관한 고뇌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전 세계 유다 민족은 언제나 열광적이고 유쾌한 방식으로 에스더의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부림절은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괴로운 현실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실질적이며 절박한 질문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험난한 역사적 현실과 곤란한 신학적 질문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부림절에 축하하며 즐겁게 지냅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를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즐기고 있습니다.



    3. 나가면서

       에스더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념하며 축하함으로써 부림절은 영성이란 엄숙함과 엄격함만이 전부가 아님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고독과 조용한 기도도 영성의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삶은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과 음식과 음료, 기억과 소망, 믿음과 의심을 나누면서 형성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을 나눈다면 그것으로 인해 침울해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 질문들은 우리를 함께 묶어 주며 또한 매우 놀랍게도 우리를 웃음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 티모시 K. 빌(Timothy K. Beal)



    4. 에스더 연대기

    BC 586년 :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함 (대하 36:17)

    BC 538년 :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대하 36:23)

    BC 537년 : 1차 귀환(스 2:1, 스룹바벨)

    BC 536년 : 성전 재건 시작(스 3:8)

    BC 516년 : 제2성전 완공(스 6:15)

    BC 486년 : 아하수에로의 바사 통치

    BC 479년 :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에 2:17)

    BC 473년 : 부림절 제정(에 9:28)

    BC 458년 : 2차 귀환(스 7:9)

    BC 444년 : 3차 귀환(느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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