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동기(MOTIVATION)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원동력이 되는 참 소망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요한복음 5:1-10, 예수 안에 있는 소망(찬95장) - 미래의 소망 ⓑ
1. 들어가며
최근에는 연예인들에 이어서 정치인이나 운동 선수들이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경우들이 많아졌습니다. 여러가지 부정행위들과 가혹행위, 그리고 상처 주는 인터넷 상의 글들과 말로 인해서 절망하고 그 모든 고통 속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에는 절망과 아픔만이 가득 차고 우울한 마음과 깊은 상처,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소망이 없으면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고 인생에 대한 목표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건강은 나날이 나빠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 속에 소망이 있으면 스스로 생명을 버리지 않습니다. 회복의 날을 기대하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 오셨으며, 또 한 주간을 어떤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겠습니까?
2. 본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도 소망이 없는 병자가 있습니다. 그의 상황은 어떠한 상황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일하시던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두 개의 큰 연못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은, 또 다른 연못인 실로암 연못에 비해 물이 훨씬 깨끗하고 오래 전부터 치료를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시던 그 날에도 연못 주변에는 치료되길 원하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데, 그 중에도 38년 된 중풍병자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으로 스스로 올 수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연못에 데려다 줄 때에는 나름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만 가면 분명 나을 것이고 병이 나으면 나의 튼튼한 몸으로 열심히 일해서 벌어 먹고 살고 가족들에게도 도움을 받는 자가 아닌 가족을 책임지는 어엿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소망을 품고 왔던 베데스다 연못은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해 왔던 그에게 더 절망을 가져다 주는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연못에 들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진과 같이 그가 굴러서 연못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벌써 다른 병자가 먼저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이때껏 자신은 연못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다른 병자들과 비교해서 스스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1) 다른 병자들에 비해서 경쟁 상대도 되지 않던 이 사람은,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열한 삶의 경쟁이 끝이 났습니다(1~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요한복음 1:3, 개역개정성경)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들어가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다. 연못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고 하니, 얼마나 경쟁이 치열 했겠습니까? 서로 연못만 쳐다보면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물에 들어갈 준비를 하며 하루 하루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치료의 장소였던 연못에 와 있는 모두가 경쟁자입니다. 그들은 각자 병이 있었기에 몸도 아팠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환자로 있으면서도 서로 돕지 못하고 서로를 경계해먀만 하니 얼마나 삶이 힘들겠습니까?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데, 아무도 서로 위로하지 못하는 삶이 베데스다 연못의 주변에 있던 이들의 삶이었습니다. 분명 우리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치열한 경쟁의 삶을 살다가 오셨을 것입니다.
자녀의 앞날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일하셨고 뒷바라지 하셨을 겁니다. 직장이나 농사를 짓는 일에서도 뒤쳐지지 않기 위해 힘들게 일하셨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방학이지만 연습하고 직장 준비하고 2학기를 준비하느라 바쁘셨을 것입니다.
항상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나,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 병자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 주간 동안 정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우리의 수고에 하나님께서 열매로 갚아 주시길 기대합니다.
경쟁상대에서 항상 밀리던 중풍병자는, 소망이 절망으로 바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더 이상 다른 병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필요를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중풍을 치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한복음 5:8, 개역개정성경)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고, 병자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치유가 있고,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절망, 우리의 치열한 경쟁의 삶이 변하여 즐거움과 기쁨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 치열한 오늘의 삶의 경쟁을 끝내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예수를 만남으로 치열한 경쟁의 삶을 끝낸 병자는, 타인에 대한 비난도 끝이 났습니다(5~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한복음 1:7, 개역개정성경)
38년 된 중풍병자는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가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결과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고 타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서로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서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서로 자기만 옳다며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국민들만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겠습니까?
중풍 병자 역시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연못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허리가 아픈 저 사람 때문에, 다리가 아픈 저 사람 때문에, 머리가 아픈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병자들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치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패배하니 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 모두 불순종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서로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비난했다고 해서 아담은 그 죄가 없어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똑같았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을 비난하였던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더 이상 다른 이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비난이 아니라 고침 받은 그가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음껏 움직일 수 있으니 움직이기 힘든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납시다. 우리 주님을 만남으로 타인을 비난하기보다, 타인을 돕고 사랑을 베푸는 우리가 됩시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 계신 분들께 사랑의 눈빛을 한 번 보내 보겠습니다.
(3) 예수를 만남으로 경쟁에서 벗어나고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을 그만 둔 병자는,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8~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한복음 1:9, 개역개정성경)
하필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은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을 범할 경우, 그 사람은 죄인으로 취급 받았으며, 출애굽기 31:14에 의하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자신의 자리를 들었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의미로 당시에는 받아 들여졌고, 결국 안식을 범했으므로 고침 받은 자는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치유를 행하는 것이 더 귀하다는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율법에 매이지 않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서로 비난하며 상처 주는 현실에서도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전통과 관습에 매여 복음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신앙의 전통과 함께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율법 조문에 매이기보다 그 율법이 전하는 의미와 목적을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알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풍병자는 건강 회복을 위해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열한 경쟁의 삶을 살았고, 그 경쟁의 삶으로 인하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일평생의 소원이었던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더 이상 경쟁할 필요도 타인을 비난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경쟁과 비난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만납시다. 기도에 힘쓰고 사랑을 베풀기에 힘쓰며 말씀을 사모함으로써 참 소망이 되시고 참 자유를 주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납시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주께서 주시는 참 소망과 평안이 우리 마음 속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 나도 38년 된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있음을 믿고 말씀과 기도, 사랑을 베풂으로 주님을 만나고, 본문 말씀의 병자처럼 주님 주시는 소망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삶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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