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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신구약성경 주석 내용요약

21. 전도서 내용요약 설교자료 주석

by OTFreak 202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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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도서 내용요약 설교자료 주석

 

 

목차

     

     

     

     

     

    21. 전도서 내용 요약 설교자료 주석

     

     1. 들어가며 

       전도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해 아래에서 사는 삶, 곧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지적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분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전 12:13-14). 전도서는 마치 '우상 파괴자'(idol buster)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도서는 우리가 신뢰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 실망시킬 많은 것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단순히 인생이 헛되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2. 본문 

     

    (1) 우리 안의 우상을 깨뜨리게 하는 책

       존 칼빈(John Calvin)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 제조소’ (factory of idols)라고 묘사했다. 인간의 마음은 피조된 사물이나 사람을 끊임없이 삶의 최고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는 것이다(롬 1:21-25). 이러한 우상은 삶에서 우리가 계획하는 일들로, 우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다른 것들까지도 희생한다.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이방의 신들, 곧 바알, 마르둑, 이쉬타르와 같은 신들을 우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전도서에서는 한 번도 '우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부, 명예, 권력, 관계, 쾌락, 지혜 그리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개인의 삶에서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 때문에 전도서가 우리의 영성 개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로 여겨지는 '전도자'(Teacher, 전 1:1)는 마치 우상 파괴자 같다. 그는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부숴 버린다. 돈, 섹스, 권력, 지위, 인간적 지혜, 의로워지려는 우리의 노력들까지 그 무엇도 예외일 수 없다(7:15을 보라). 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라고(전 1:2) 말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선한 것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또한 그 어떤 것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그 어떤 것에도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때만 은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일의 결국'을 들을 준비가 다 갖추어진다.

    헛된 인생을 하나님으로 채울 때, 진정한 기쁨이 있는 인생이 된다.

     

    (2) 전도서, 누가 쓴 것일까?

       '우상 파괴자'로서 전도서의 기능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먼저 전도서에는 한 사람 이상의 저자가 있다. 전도서 가운데서 '교사'(NRSV, NIV. NLT)라고 불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사람은 때로 '설교자 (KJV)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 단어 '코헬렛 (Qoheleth)을 번역하지 않은 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전도자'나 '설교자 (Preacher)가 아니라 '회중 지도자'(Assembler)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이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검토하겠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도자가 1:12에서 말하기 시작하고, 12:7에서 말을 끝맺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1:12와 같은 독특한 출발은 고대 중동의 자서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도입이다. 그러므로 1:12-12:7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전도자 자신의 영적 여정을 소개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전도자의 말은 그 전도자를 3인칭으로 서술하는 두 번째 지혜 교사의 말속에 인용의 형태로 나타난다(1:1-11; 12:8-14). 한편 12:12에서는 두 번째 지혜 교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지혜문학에서 볼 수 있는 문체의 일종이다. 결론적으로 전도서는 두 번째 지혜 교사가 전도자의 말을 길게 인용하여 그에 대한 평가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을 자기 아들에게 가르치는 책이다.

     

    (3) ‘해 아래에서 삶의 의미 찾기

       전도자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전도서의 표제는 이 전도자를 '다윗의 아들'로 본다. 뿐만 아니라 전도서 곳곳에 이 전도자가 솔로몬이라는 많은 암시들이 나온다. 앞서 살펴본 대로 '회중 지도자'라는 의미의 '코헬렛'이라는 명칭조차도 전도자가 솔로몬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성전 봉헌 기사에(왕상 8장) '코헬렛'의 어원이 되는 '모이다'라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솔로몬의 실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솔로몬의 삶을 근거로 느슨하게 구성된 한 편의 이야기 같다. '코헬렛'이라는 별명을 사용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이 전도자라는 말을 들을 때 부나 권력이나 지혜 자체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솔로몬을 떠올리게 만든다. 솔로몬이 지녔던 부, 권력, 지혜 등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보다 훨씬 적게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전 2: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전도서 2:12, 개역개정 성경)

       전도자의 교훈은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은 괴로운 인생을 살다. 가 죽는다.” 반대로도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은 죽기 때문에 인생에 의미가 없으며,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 전도서 2:12-17을 살펴보면 전도자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그는 인생에서 의미를 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지혜를 거론한다. 그는 지혜 교사이므로 지혜라는 영역이 그에 게 풍성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단락 시작 부분에서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우위에 있다면서 그 가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눈이 어두워 넘어지지만, 지혜가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 그럼에도 그는 14절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찾아온다. 따라서 전도자는 지혜라는 것도 길게 보면 어리석음을 능가하는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은 헛되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해 아래서 의미 있는 것을 찾는 일에 실패한 전도자는, 종종 이 세상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는 즐기라고 주장한다(2:24-26; 3:12-14; 3:22; 5:18-20; 8:15; 9:7-10). 문득 “오늘을 즐겨라”(까르페 디엠, carpe diem)는 교훈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 단락에서는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체념의 목소리도 들린다. 어떤 사람이 드물게 인생에서 즐거움을 누린다고 해도 기쁨이 주는 유익은 험난한 삶이 주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가리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5:20), 달리 말하면 즐거움은 영혼에 주사한 노보카인(Novocain, 국부 마취약)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삶을 세심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드러난다고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지혜 교사로서 경건한 자들이 보상받고 악인들이 심판받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7:15-18에서 보듯이 전도자가 이 땅에서 목격한 사실은 자신의 기대와 너무 달랐다. 의로움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자 그는 삶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의로운 행동에 과연 보상이 따르기는 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전 7:16)고 역설한다.

     

    (4) ‘해 위로' 관점 이동하기

       이러한 전도서의 관점은 성경에서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이 책이 정경(正經)에 포함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익명의 두 번째 지혜 교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영적인 교육을 하기 위해서 이 책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했다. 요컨대 지혜 교사는 더할 나위 없이 옳다. 고된 '해 아래에서'의 삶을 살고 나면 당신은 죽는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창 세기 3장에 대한 많은 암시들과 함께 우리는 전도자의 발언을 타락한 세계의 진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책의 결론은 지혜 교사의 분석에 순순히 동의하지 않는다. 결론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강조한다. 타락한 세상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또는 타락한 세계의 바로 그 어둠 때문에 아버지는 결론적으로 해 아래의 삶 너머로 자기 아들을 불러 앞으로 있을 심판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전 12:13-14).

     

    (5) 신약성경의 전망 속에서 전도서 읽기

       신약성경은 전도서를 한 번도 명시적으로 인용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서 8:18-25에 나오는 바울의 주석에 비추어 전도서를 읽는 것은 흥미롭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어떻게 '허무함'에 굴복시켰는가에 관해 말하며, 70인 역 성경이 전도서의 '헛된' (hebel, 헤벨)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한 헬라어 '마타이오테스’ (mataiotes)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묘사하면서 타락의 결과가(창 3 장) 어떻게 나타났는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전도자는 '해 아래의 삶을 저주의 영향 아래 있는 삶으로 바라보았다. 삶이 '무익하다' (futile)라는 인식은 전도자를 철저히 낙심케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에게는 희망의 원천이 된다. 바울은 '창조 자체가 썩어 짐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을 희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 세계를 허무함에 복종시키셨다는 사실과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을 인지하고 있다.

       바울의 해석은 전도서의 빛 아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게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허무한 세계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허무한 세계에 굴복시키셨다. 빌립보서 2:6-11의 유명한 찬송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의 삶에 굴복시키셨는지 묘사한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 보면 그분도 ‘해 아래에서 삶의 '허무함을 경험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지 않았다(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한복음 1:10, 개역개정 성경)

       공관복음서는 그분이 궁정에서가 아니라 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말해 준다. 그분이 삶의 최후를 맞이할 때 군중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그분을 버렸다. 유다가

       그분을 배신했고,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했다. 그러나 전도자가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으로 예수님이 타락한 세계의 '무의미함'을 경험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마 27:46) 외칠 때였다.

       갈라디아서 3:13의 말로써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패배시키셨다(고전 15장). 달리 말해 예수님은 전도자가 삶의 의미에 확신을 가지는 것을 가장 방해했던 바로 그 죽음을 패배시키셨던 것이다.

     

    3. 나가면서 

       신약성경의 실상의 빛 아래서 전도서를 읽으면,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죽음을 이김으로 삶에 의미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가 탁월하게 빛날 때, 곧 우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the One)이 빛날 때, 우리의 일, 즐거움, 재물을 포함한 우리 삶의 다른 측면들이 중요한 자리를 적절히 차지할 수 있게 된다.

    -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

    4. 전도서 연대기 

    • BC 970년 : 솔로몬의 즉위
    • BC 959년 : 성전의 완공(왕상 6:38)
    • BC 931년 : 솔로몬의 사망(왕상 11:43)

     

    5. 더 읽으면 좋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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