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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설교/42 누가복음 설교

누가복음 10장 25절-42절,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 매일성경 큐티

by 구약장이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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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25절-42절에 기록된 율법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되새기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이웃 사랑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속에서 '가장 좋은 편'을 선택하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 좋은 이웃이 되는 삶, 주님 말씀을 최우선으로 두는 삶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42절,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 매일성경 큐티
누가복음 10장 25절-42절,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 매일성경 큐티

 

 

누가복음 10장 25절-42절,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서론

 

오늘 이 새벽, 우리는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밝히고, 이웃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달으며,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귀한 ‘가장 좋은 편’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원한 생명, 모든 인간의 갈망이자 궁극적인 질문 앞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답을 제시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 속에 영생의 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이웃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고, 조건을 따지려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이웃 사랑은 자격과 조건이 아닌, 긍휼과 자비에서 비롯됨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분주한 세상 속에서 진정으로 귀한 ‘가장 좋은 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선택을 칭찬하시며, 말씀 경청이야말로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유산임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새벽,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

 

첫째, 영생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으로 증명됩니다.

율법 교사는 영생이라는 영원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모호하게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이미 그 답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는 단순히 지식적인 암기를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정확한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의 대답을 인정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행하라’는 것은 단순한 율법적 행위,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 땅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우리는 죄인이며, 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함’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오직 주님의 은혜,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자는 변화된 삶, 즉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으로 그 구원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스스로는 할 수 없었던 사랑,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새벽,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부어주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마음을 더욱 키워나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으로 영생을 증명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이웃 사랑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율법 교사는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 후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속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옳게 보이고, 이웃 사랑의 범위를 좁혀서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교묘한 속셈이었습니다.  ‘내 이웃’을 특정 범위 안에 가두어 정의하고, 그 범위 밖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 의무가 없다고 합리화하려는 인간적인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 교사의 좁은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종교 지도자였던 그들은 율법에 얽매여 있었는지, 혹은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는지, 고통받는 이웃에게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그러나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그 광경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주막 주인에게 돈을 맡기며 계속해서 그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추가 비용까지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신 후, 율법 교사에게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 교사가 던진 질문과 묘하게 달랐습니다.  율법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질문의 주체가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이웃’의 범위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가 핵심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에둘러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대답을 긍정하시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지는 자격 심사가 아니라,  먼저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명확합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계산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이 새벽,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시고,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에게 먼저 손 내밀어 사랑을 베푸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42절,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 매일성경 큐티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이다.

 

 

셋째, 우리에게 가장 좋은 편은 예수님과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환대하기 위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손님을 잘 대접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언니를 돕기보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마르다는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만이 쌓였고, 결국 예수님께 나아가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말씀하소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데, 동생은 말씀만 듣고 있는 모습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열심과 봉사하는 마음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중요한 가치를 마르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바로 ‘가장 좋은 편’, 즉 ‘Better Part’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좋은 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리아가 택한,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마르다처럼,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분주함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며, 영원한 생명의 샘물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유산이 바로 주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편을 택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분주함에 쫓겨 마르다처럼 염려와 근심에 휩싸여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며 영원한 유산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편은, 변치 않는 진리,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새벽,  세상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가장 좋은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생의 길, 이웃 사랑의 실천, 그리고 가장 귀한 가치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듣는 말씀에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제자가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세상은 자신만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우리를 유혹하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편”을 택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풍성히 흘려보내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영생의 길, 이웃 사랑의 참된 의미, 그리고 가장 귀한 가치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유혹하지만, 저희는 주님의 부르심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가장 좋은 편으로 택하여,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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