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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적 논쟁의 주제들 2 - '성화와 선행'에 대하여

by OTFreak 202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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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신학적 논쟁의 주제들 2 - '성화와 선행'에 대하여




조직 신학적 논쟁의 주제들 2 - '성화와 선행'에 대하여


  


  '선행'(善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화 교리 내에서 선행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16세기 종교개혁 이래로 지속되어 온 논쟁거리였습니다. 

  구교(로만 카톨릭)에서는, 선행 혹은 “사랑의 행위”는 “믿음의 형성”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실제적인 외적 행위로 “실현화”(형상화) 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형성되지 않은 믿음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믿음의 표현으로써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구교의 신학에서도 이신칭의 즉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구교의 신학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거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행으로 형성되지 않은 믿음(외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행위)은 추상적인 믿음이므로 그런 믿음에는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 시대 때 마틴 루터를 통해 특별히 도전을 받은 개념이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읽으며 믿음을 형성함에 있어 선행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선행을 믿음의 열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학에서는 선행을 성령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학에서는 선행을 영생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형상적 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 가운데서 선행의 위치를 상대화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는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 개념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반율법주의적 삶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쟝 깔뱅은 “율법의 제3용법”을 특별히 강조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성령과 동행하는 경건으로 인해 성경이 말하는 도덕법을 지킬 수 있다고 보는 용법입니다. 경건 생활은 곧 믿음과 같이 간다는 의미입니다.

  루터 역시 자신의 중요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선행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억지로 하는 선행이 구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루터가 믿음만을 강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루터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 편견일 뿐입니다.



  성경은 선행을 하나님의 다스림의 증거로 보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모세의 율법에 순응하는 행위로 이해하며 이런 행위야말로 다른 이방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해주는 지점으로 이해하였습니다(신 4:5-8). 신약 성경에서 거룩한 삶의 양식은 초대교회적 삶에 늘 요청되던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는 야고보서에 잘 드러납니다(“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약 2:26).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많은 서신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 참조. 살전 4:7–8).


신 4:5-8,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살전 4:7-8,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신약 성경은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과 염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적 비유 속에서(마 25:31-46), 주의 날에 있을 행위에 대한 심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고전 3:5-14; 참조. 고후 5:10), 그리고 백보좌 심판대의 가르침 속에서(계 20:11-15) 잘 드러납니다. 

  이런 본문이 말하고 있는 질문은 


  첫째, 실제로 의롭다 인정받기 위해 선행이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둘째, “외부적 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셋째,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삶의 질에 근거하여 다양한 천상적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인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트렌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 교의는 첫 번째 관점, 즉 칭의를 받기 위해 선행이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은혜 안에서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관점을 함께 견지합니다. 개신교 신학은 두 번째 관점을 지지하는데, 즉 선행은 이미 거듭난 사람의 증거로 보는 것입니다(이를 “실천적 삼단논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관점은 개신교 신학 내에서 여전히 논쟁이 되는 관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는 한 사람의 선행이 적어도 종말을 맞이하게 될 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정통 교단은 모든 선의 궁극적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만이 인간의 행위가 “선”(善)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주요 구절


겔 36:24–27; 마 3:8; 마 25:31–46; 롬 6:15–23; 고전 3:5–14; 고후 5:5–10; 엡 2:8–10; 살전 4:3–8; 약 2:14–26; 계 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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