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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삶

20200603수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 우표 - 2020년 6월 5일 예정

by OTFreak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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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 우표 - 2020년 6월 5일 예정

 

 

   일제 강점기 중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독립 운동의 큰 획을 그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입니다. 이 전투는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당시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최명록) 그리고 안무의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의 독립군 1개 중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및 남양수비대 예하 중대와 치른 전투를 말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에 독립군 부대 1개 소대가 두만강 너머의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의 국경 초소를 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를 '강양동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로부터 시작하여 대전투가 펼쳐지게 됩니다. 

   강양동의 초소 습격을 들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로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이미 독립군사령부는 봉화리에 매복시켰고, 독립군 일부를 추격해 오던 일본군을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였고 약 6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습니다.

   연이어 피해를 보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 휘하의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켜 독립군을 공격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패배하면서도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 봉오동까지 유인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 4개의 중대는 미리 봉오동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1중대는 상촌의 서북단, 2중대는 동쪽 고지, 3중대는 북쪽 고지 그리고 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였고, 홍범도 장군은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여 일본군 선봉을 봉오동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오도록 끌어 들였습니다. 

   계획대로 봉오동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 700명이 일본군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이 전사하였으며 2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반면에 독립군은 장교 1명과 군졸 3명이 전사하고 몇 명의 부상자만 있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그간에 카자흐스탄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카자흐스탄과의 협상을 통해 빠르면 8월, 늦어도 올해 하반기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우리 나라로 모셔 오기로 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 오는 이 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홍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올해 3월 말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활하려 하였는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연되었습니다. 이 노력이 속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길 바랍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우리 나라의 대전 국립현충원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기념하여 기념 우표가 발행된다니, 역사 교육에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우표를 통해 둑립운동가들에 대한 더 큰 존경의 마음이 표현되길 바랍니다.

 

   2019년에 아이들과 함께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적이 있었는데, 우표까지 나오게 되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까지 모셔 온다면, 나라 독립을 위해 수고하신 선조들의 수고에 조금이나마 감사의 예를 표하게 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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