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공부/신구약성경 주석 내용요약

10. 유배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다

by OTFreak 2020. 9. 20.
반응형

목차

     

     10. 유배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치셨으나, 또한 자기 백성을 싸매셨다

     

    1. 성경 본문

       열왕기하 25:11-30, 역대하 36:20-23, 예레미야 37-52장,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오바댜

     

    2. 들어가며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제 위에 열거한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 님이 그분의 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시며 포괄적인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3. 본문에서

       (1) 심판 가운데서도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셔서 바벨론으로 유배를 보내신 모습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다. 이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히 12:6). 비극적이지만 필요했던, 심판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의 권위는 세우고 유일신이신 여호와의 주권을 분명하게 자리매김하셨다. 유다 백성은 자기 삶의 본질로 여겼던 모든 외(外)적 요소들, 곧 자신들의 왕, 성전, 도시와 자신들의 땅까지 빼앗겼다.

       이러한 외적 요소에 기댈 수 없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등에 짊어질 수 있고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 것들만이 남았다. 그것은 주로 성경과 그들의 기억 그리고 관습들이었다. 이것들을 간직하고 다듬어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이전에 알고 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 사실 그들이 배운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가르침으로,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헌신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만족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훨씬 넘어서 행동하고 일하고 계심을 배웠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그리고 전보다 더 심오한 방법들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시 23:1) 것을 경험하는 일이 환경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듯 심판 가운데에서도 복이 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고통의 막대기에 입 맞추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 결과, 유배 기간 동안 유다인들이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에 8:9) 흩어졌을 때, 유대교와 유대 문화는 어떠한 정치적, 지리적 기반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통해 그 본질적인 특징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하나님은 그분과 함께 개인적으로 동행하는 유배된 백성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교제의 필요성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이 관계는, 인간 편에서 보자면 이전보다 더 안정된 모습이다. 에스더와 다니엘은 아담이나 모세가 전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 이 누구인지 발견한다. 이전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부요함은 이제 개인 안에 머무르게 되고, 인간의 유한성은 율법과 가족, 발전하는 회당 제도와 수많은 공공 관습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보완되었다.

       이제 선지자 각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보여 주는 중추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대하 20:20)

       이스라엘 사회에서 선지자는 '재야 세력'(outsider)으로서 늘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모든 제도권 심지어 유다인의 제도권으로부터도 철저하게 구별된 선지자의 독립적인 위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포로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강하게 각인되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어디서 모르게 나타나서 하나님을 대언할 수 있는 권리'가 선지자들에게 보장되었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반기며 그들이 제 역할을 다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선지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위와 지도력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온 지도자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는 '하늘의 하나님’으로 인식되었다. 그분은 성경적 용어로 '첫째 하늘'이라 불리는, 이 땅의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접하실 수 있다(대하 36:23; 스 1:2; 느 1:4; 단 2:17-19, 28).

       이스라엘이 바벨론 유배라는 고통을 겪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새로운 장소로 '하늘나라(天國)'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셨다. 훗날, 예수님은 '공식적인' 종교나 정치적인 사안을 넘어 모든 이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때 이 개념을 사용하시고 확장시키셨다. 유배의 경험과 심판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던가에 대한 경험은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사 52:7)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포로된 삶은 감옥과 같은 삶이지만, 이 삶이 유다를 새롭게 하였다.

     

       (2) 유배당한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유배라는 심판에 대해 부인(否認)으로 시작하여 분노와 애통, 혼란과 비통을 거치더니 종국에 가서는 유배와 심판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아예 거부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만연하자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 후반기에 시작된 거짓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 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참 선지자들은 심판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며 심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이스라엘의 복은 분열된 국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판 가운데 그리고 심판을 넘어서 얻게 되는 참된 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온 가족과 모든 공동체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새로운 관습과 예배 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관습과 예배 의식은 모든 인간적인 제도로부터 자유롭고, 제도가 붕괴되고 파괴된 후에도 살아남는다. 관습과 예배 의식의 발전은 유배 생활 가운데 하나님 백성의 영성 개발의 중심이 되었다. 또 이러한 발전은 후에 흩어진 유다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 스스로 인간적인 제도로부터 독립된 탈(脫) 민족적, 영적 공동체로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유다인들은 유배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유일신론을 이해하고 율법 준수를 절대적인 명령으로 완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단, 그들이 이 명령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명령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후속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어두웠다. 그 어두움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3) 유배와 이산(離散)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중재는 율법과 하나님을 향한 개인의 거룩함과 신실함에서 개인적인 책임이 강조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이는 다니엘과 에스더와 같은 인물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점은 하나님을 향한 개인의 신실함과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인종적으로 고립된 집단 속에 숨어 사는 민족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 국가적 정체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함께 거하는 다른 모든 백성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될 것을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아래서 '바벨론'의 번영을 추구했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지 않았다. 이것이 가능 했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렘 29:4-7). 세상 모든 민족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했고,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전 세계를 향한 증인으로 선택받았다. 비록 요나서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전체로 봐서는 실패했지만, 유배와 이산(離散)을 통해 이 사역은 의미심장하게 수행되고 있다. 이제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게 하라.

       그러나 유배와 이산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 없었고, 문화적인 자기의(自己義)에 빠진 각 개인을 해방시킬 수도 없었다. 물론 많은 선한 일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유배와 그 뒤에 이어진 귀환을 겪으면서 개인의 행위와 공적 예배 의식을 강제로 규정하는, 억압적이고 형식적인 율법 제도가 점점 힘을 얻어 갔다. 예수님은 이 숨 막히는 형식화를 철저히 폭로하고 비난하셨다.

       또 유다인들이 유배 기간에 당한 잔인한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는 데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꼭 필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때때로 개인이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억압과 박해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출 수는 없었다.

       고난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속죄의 방편이 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바른 선택을 내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발견하게 된다. 고난이 주는 아픔이나 애가의 눈물이 없이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지금, 영성 개발이라는 혹독한 과정 속에 있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는 말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롬 2:4) 하시는 것이다.

     

       (5) 실패 너머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신다.

       이러한 차원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 이방 땅에서도 주를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시 137:4). 하나님은 한 민족이나 한 문화의 하나님이 아닌 모든 인류의 하나님으로, 온 세상으로 하여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일찍 단념해 버린 어떤 장소나 사건, 사람들 가운데 계실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둘째, 율법을 완수하려고 한다면, 단지 외부로 나타난 행동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율법에 합당한 행위가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법을 지키려고 애쓴다고 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따르는 행위가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모습으로 나온 결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성 훈련이 바로 해답이다. 영성 훈련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유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 주었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미신이 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4. 나가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는 물론 그 실패 너머에서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과 함께하면 항상 아침이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훨씬 더 나은 아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세기에 걸쳐 견디어 온 흑암과 죽음마저도 언젠가는 깨어지고 흩어질 날이 올 것이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칠 것이다(눅 1:78하-79상)

     

    5. 더 읽어보면 좋은 글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