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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신구약성경 주석 내용요약

25. 예레미야애가서 내용요약 설교자료 - 주석, 묵상 가이드

by OTFreak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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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5. 예레미야애가서 내용 요약 설교자료 - 주석, 묵상 가이드 

    마사다 요새의 무너진 돌무더기와 같이 예루살렘도 슬픔 속에 무너졌다.

    1. 들어가며

       2001년 9월 11일, 빌딩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충격적인 국가적 재난을 겪고 난 이후, 미국인들에게 과연 희망찬 미래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때 미국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은 상처와 공포 그리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예레미야애가에서 위로와 안내를 받고자 했다.

       예레미야애가는 사람의 마음에서 어둡고, 모호하고, 절망적인 모퉁이 그리고 잊거나 회피하려는 집단적인 경험을 다룬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회피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고통과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우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마음 아파하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피시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비극을 겪어야 하는지 따질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 곧 극한 상황에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일에 능숙하고 값싼 위로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정면으로 비극을 응시하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예레미야애가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하여 강력한 답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장 절망적인 탄원과 비극적인 흐느낌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2. 본문

    (1) 해결되지 않은 슬픈 외침

       이스라엘은 탄원 시편들, 곧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고백한 시적인 불평이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했고,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느꼈으며 비극의 시대에도 그들은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으며, 불만을 토로하고, 고발하고, 한탄했다. 어떤 이들 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뻐해야 하고,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애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심오하고, 좀 더 진솔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써 내려간 문헌(literature)이다. 그 탄원들은 항상 행복하고 기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의 신자들에게 “당신은 신앙이 있기에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견딜수 없는 짐을 지우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비탄을 어느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거나 또는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슬픔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예레미야애가가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언제나 기쁨에 찬 신자라면,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탄원의 시편들은 때때로 기독교가 너무 피상적이고, 흥겨워만 하는 종교라는 인식에 대해 신앙의 중심을 균형 있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전적으로 공동체의 만가(晩歌)와 탄원의 시편으로 구성된 시 모음집이 나온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 시편들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 레미야애가의 본문이 때때로 예레미야의 탄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슬픔이 특별한 이유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끔찍한 대격동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민족 신앙의 중심지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대한 선물이었다. 예루살렘의 패망은 국가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재난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심각한 위기를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언약 공동체에게 하나님께 신실하라고 선포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이 재앙을 중지시키지 않으신다면, 이 밖의 다른 재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애가 안에 나타난 시의 연들(stanzas)은 히브리어의 22개 자음으로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문은 아마도 민족적 금식이나 애도의 날에 열린 예배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할 수 있게 만든 것 같다. 따라서 예레미야애가는 이스라엘을 위한 찬송가다. 예레미야애가의 배열은 여기서 '슬픔의 역사'(grief work)라는 고통의 과정을 공식적으로 분명히 거쳐 왔음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애가에는 해결되지 않은 슬픈 외침이 가득하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희망 곧 마지막 때에 주님이 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실 것이라는 신뢰의 표현이 나타난다(3장). 예레미야애가는 실제적이고, 공개되고, 들을 수 있게 된, 우리가 겪는 최악의 슬픔이요, 최악의 절망이다. 예레미야애가에서 가장 극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탄원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가능한 한 슬픔을 비껴가려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것이다.

     

    (2)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슬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장례식은 왜 있는 거지? 아무리 애도한다 한들 이미 죽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어.” 장례식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언제라도 슬퍼하거나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갑작스럽게 극한 슬픔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대개 과거의 슬픔을 다루면서, 그와 동시에 미래의 슬 픔을 준비한다. 삶은 필연적인 상실 닫힌 문들 깨져 버린 희망 그리고 붕괴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과거 예레미야애가의 성도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감동적인 슬픔의 기술(art of eloquent grieving)을 가르치는 것이다.

       장례식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사람은 슬픔의 시기가 찾아오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화나고, 상처받고, 공허하고, 절망적인 느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진실한 슬픔을 동반한 다른 모든 감정들도 느끼지 못한다.

       인류 역사상 피로 얼룩진 세기라 불리는 20세기에 인류는 전쟁, 대학살, 집단 학살 등의 온갖 비인간성의 모습을 드러냈다(21세기 역시 장래성 있는 출발은 이미 벗어난 듯 보인다). 상황이 이런 만큼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욱 예레미야애가를 필요로 한다. 일단 슬픔을 적절히 드러내 표현하고, 고통을 공개해 나누고, 현 상황을 정직하게 인정 하기까지는 어떠한 회복도, 어떠한 개혁이나 갱생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애가는 우리에게 슬퍼하는 법, 눈물이 필요할 때 흐느끼는 법을 가르쳐 준다.

    슬픔을 통하여 소망이 찾아올 수 있을까?

    3. 나가면서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에 사로잡힐 것이다. 슬픔이 우리의 영성 개발에 어떠한 도움을 주는가?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슬픔은 무엇인가? 슬픔의 암울한 여정이 어떻게 종종 급격한 성품의 변화를 일으키는가?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비탄의 원리들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가?

    - 윌리엄 H. 윌리몬(William H. Willimon)

     

    4. 예레미야애가 연대기

    • BC 586년 : 유다의 멸망(대하 36:17), 예레미야의 사역 종결(렘 39:1-18)
    • BC 538년 :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대하 36:23)
    • BC 537년 : 1기 귀환(스 2:1, 스룹바벨)
    • BC 536년 : 성전 재건 시작(스 3:2)
    • BC 516년 : 제2성전 완공(스 6:15)
    • BC 458년 : 2차 귀환(스 7:9, 에스라)
    • BC 445년 : 3차 귀환(느 2:9-11, 느헤미야)

     

    5. 더 읽으면 좋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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